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명여(明汝). 할아버지는 민응수(閔應洙)다. 아버지는 민백창(閔百昌)이며, 생부는 민백헌(閔百憲)이다. 어머니는 홍중주(洪重疇)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진사가 되고 곧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798년 홍문록(弘文錄)에 4점을 얻어 홍문관에 기용되었다.
1801년(순조 1) 부응교(副應敎)로서 황해도암행어사에 발탁되어서는 해주판관·수안군수·신천군수와 황해도의 병사·수사 등의 부정을 철저히 적발하여 징치하였다. 이때 해주 지방의 염세(鹽稅)와 장연 지방의 어전(魚箭)의 폐단을 통박하여 시정하게 하였고 군역의 불합리성을 바로잡게 하였다.
1803년 원접사(遠接使)를 거쳐 대사간이 되어서는 의리를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어 그 토대 위에서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1807년 이조참의에 올랐는데, 여기서도 능력을 발휘하다가, 3년 뒤 다시 대사간의 지위에 올라 극진한 간쟁을 통하여 왕의 전횡을 막고 국정의 합리화를 꾀하였다.
도총부(都摠府)의 변통 초기(變通草記)에 대한 말썽으로 중화(中和)로 귀양갔다. 3년 뒤 호군(護軍)이 되고, 다음 해 1814년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감독책임을 진 남묘(南廟)의 수리공사가 허술하다는 말썽이 생겨 파면되었다. 1년 뒤 다시 우참찬이 되고, 다시 3년 뒤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그 해에 죽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