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분충(奮忠). 아버지는 증좌찬성(贈左贊成) 민수산(閔壽山)이다.
1437년(세종 19) 음보(蔭補)로 내금위(內禁衛)에 속하였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 부사직(副司直)에 이르고, 1450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사복시대호군(司僕寺大護軍)으로 있다가 무과에 합격하여 사복시 윤(司僕寺尹)이 되었고, 이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주로 중추부에 속하여 있으면서 동지중추원사·첨지중추원사를 거쳐 1464년(세조 10) 중추원사가 되었다.
1466년 무과 중시(武科重試)와 등준시(登俊試)에 합격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고 용양위상호군(龍驤衛上護軍)에 임명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총통도장(銃筒都將) 율원군(栗元君) 이종(李倧)의 휘하가 되어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중추부동지사가 되었다.
동시에 여산군(驪山君)에 봉하여졌다.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형 민서(閔敍)가 남이(南怡)와 함께 모반한 혐의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관직과 공신록을 삭탈당하고 충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예종의 특지로 풀려나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위양(威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