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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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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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거나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삼아 성립한 종교들을 가리키는 종교용어. 신종교 · 자생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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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최제우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거나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삼아 성립한 종교들을 가리키는 종교용어. 신종교 · 자생종교.
내용

그들은 하나의 외형적인 집합 개념이다. 민족종교는 앞으로 올 후천선경(後天仙境)의 이상세계에서 우리 민족이 그 주역을 담당하고, 한반도가 그 중심이 된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민족주의적 개벽사상(開闢思想)이 한국민족종교의 핵심사상을 이루고 있고, 그 위에 보국안민(輔國安民: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과 광제창생(廣濟蒼生:세상의 모든 사람을 널리 구제하는 것)이 주창된다.

시련에 빠진 민족의 구원을 추구하려는 역사적 운동이 한국민족종교 운동이다. 그 역사적 운동은 민족애라는 사상적 동기와 역사주체로서의 민족에 근거한다. 따라서 역사주체로서의 민족이라는 자연집단과 그에 대한 사랑과 참여라는 민족애가 한국민족종교의 역사적 실체를 이룬다.

한국민족은 단일 민족이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이 동일한 내용이며 개념으로 쓰여왔다. 이러한 경우는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을 수 없고, 또 서양의 모든 근대국가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한국의 문화상황에서 한국민족종교가 나타난 것이다.

일제하에서 한국민족종교라는 의식을 외부로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한국자생종교들이 민족종교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1949년 1월 증산교통정원(甑山敎統整院)을 결성하는 자리에서 이정립(李正立)은 민족종교를 역설했다.

그리고 1966년 그는 <증산교행동강령 甑山敎行動綱領>을 통해서 증산천사의 사상을 본받아 ‘민족종교’를 건설하자고 분명하게 주창하였다. 그러다가 1985년 서울에서 한국자생 종교들이 한국민족종교협의회(韓國民族宗敎協議會)를 결성하였다.

민족종교라는 개념은 이처럼 민족주의적 개벽사상을 수용한 일군의 종교들이 스스로 자칭한 선언적 개념이기 때문에, 강력한 이념적 의미를 지닌다.

민족종교는 망국의 위협에 휘말리던 19세기 중반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는 민족적 비운의 시기에 태어났으므로 민족애가 종교적 신념으로 승화되고 보국안민이 종교적 실천이상으로 확립되었다. 그 예가 3·1독립 만세운동이었으며, 천도교가 주역을 담당한 것은 필연이었다.

만세운동에 필요한 세력과 조직, 그리고 가동인력과 국제관계에 있어서 당시의 유교, 불교, 그리고 기독교는 각각 천도교보다 특정한 면에서는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보국안민을 실천이상으로 삼았던 천도교는 민족애의 이름으로 민족을 통합하는 일에 어떤 종교보다도 설득력이 있었다.

민족종교가 지닌 이러한 통합력을 일제가 간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민족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조직적인 탄압정책을 폈다. 그리고 광복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도 민족주의가 발전의 저해요인이라는 논리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민족종교는 처음부터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오직 민족의 개벽에 대한 희원(希願)을 지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에서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이어진 사회적 붕괴 과정에서 국민대중은 도탄에 빠지고 혹심한 정신적 혼돈과 방황을 갖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는 대안의 하나로 민족주의적 개벽사상이 동학(東學)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대안을 제시했던 갑오동학혁명은 필경 1894년(고종 31) 김제 만경뜰 호남평야에서 일어나, 그 후 민족종교 운동에 하나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한반도 최대의 곡창인 호남평야는 미래의 이상경 또는 이상사회에 대한 희원이 담긴 미륵신앙의 중심지였다.

동학혁명은 이 지역이 미래사상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던 것이다. 동학 이후 한국의 종교들은 이 지역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국종교로 등록되었다. 예컨대 증산교가 그러하고, 지금에 와서는 개신교가 그러하다. 한국민족종교 가운데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다만 대종교(大倧敎)만은 국내에서 활동하지 않고 만주 간도지방(지금의 延吉)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이 지방에 연고가 없었다. 한국 기독교는 6·25전쟁 이후 월남 기독교인들, 특히 평안도 출신이 주도하였으나 1970년대 말 이후에는 점점 호남인들이 기독교의 주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사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정감록에 나타나는 십승지(十勝地)가 충청북도 이남의 남한에 위치하여 이른바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을 반영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동학 이후의 민족종교운동은 19세기 말에 들어서서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조선 중기 이후에 꾸준히 발전되고 유지되었던 민간전승의 복합적인 신앙들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한국민족종교운동이 수운에 의하여 갑자기 창조된 것도, 수운의 사상이 기존의 어느 종교전통의 교리나 경전내용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수운의 사상은 조선 중기 이후에 면면히 흐르면서 발전되어 온 국민대중의 희원과 살아있는 신앙을 개벽사상으로 체계화한 것이었다.

조선의 체제사상 밖에서 발전, 전승되던 희원과 신앙,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화주의(中華主義)에 대한 사대사상(事大思想)을 극복하고, 왜적(倭敵)의 침략을 막아내어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고 백성이 편하게 사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 수운은 이 민간전승의 살아있는 신앙을 ‘보국안민’이라는 교리로 표현하였고, 수운 이후 보국안민은 한국민족종교 사상의 상징적 깃발이 되었다.

수운이 보국안민을 제창했을 때, 많은 국민대중이 이에 호응했다. 동학은 그렇기 때문에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삼남지방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는 보국안민의 정신과 그 내용이 이미 한국의 민간전승 신앙에 전해져 오고 있었기 때문에 수운의 교리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선이해(先理解)나 사전친화성(事前親和性)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주장이나 사상이 대중에게 전해지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한국자생종교들은 거의가 민족주의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 사상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모두 민족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종교는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수운 최제우의 동학에서 일부(一夫) 김항(金恒)의 정역(正易)사상을 거쳐 증산 강일순(姜一淳)의 증산교와 소태산(小泰山)박중빈(朴重彬)의 원불교(圓佛敎)로 이어지는 종교들로, 이들은 남조선사상을 반영하면서 주로 호남평야에서 인정을 받고 성장한 후에 전국에 전파되는 과정을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홍암(弘巖)나철(羅喆)의 대종교(大倧敎)와 같이 국조 단군(檀君)을 신앙대상으로 삼고 민족주체의식을 신념의 기반으로 하는 단군계 종교로서, 중국의 순환사관이나 불교의 윤회관과 처음부터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상수관(常數觀)을 논리의 틀로 삼고있는 개벽관을 직접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계 종교들은 한민족이 앞으로 다가올 이상사회의 주역이 된다는 확신을 갖는 점에서 전형적인 민족종교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한국민족종교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개벽관을 지닌 종교와 단군계 종교들로 대별되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사상을 지니고 나타난 다양한 종교들이 그 중간에 속한다. 이처럼 민족종교는 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제1유형은 개벽형(開闢型)으로서, 이에는 수운계, 일부계, 증산계, 그리고 원불교계에 속하는 종교들이 있다. 첫째, 수운계는 동학의 정통을 이은 천도교(최제우, 1860)와 이에서 갈라진 시천교(侍天敎)[이용구(李容九), 1906], 천진교(天眞敎)[김연국(金演局), 1913], 수운교[이상용(李象龍), 1923] 등의 큰 교단들 이외에 20여 개가 분파하였다. 둘째, 일부계는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난다.

먼저 일부의 ≪정역≫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학회와 정역교 등이 나타났으며, 일부의 수행전통을 이어받은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송철화(宋喆和), 1960]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정역≫은 일부 이후의 한국자생민족종교의 교리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셋째, 증산계는 1909년 증산이 사망하자 수많은 교단으로 분화되었으며, 그 가운데 하나인 보천교(普天敎)[차경석(車京石), 1911]는 1920년대 한국 제일의 교세를 가진 종교로 급성장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태극도(太極道)[조철제(趙哲濟), 1918], 증산교본부[이상정(李祥昊), 1928], 증산법종교[강순임(姜舜任), 1938], 대순진리회[박한경(朴漢慶), 1969], 증산도량[안세찬(安世燦), 1974] 등을 포함하여 50여 개의 교단이 있다. 그리고 원불교(박중빈, 1916)는 지금까지 분열되지 않은 채 발전하고 있다.

제2유형은 단군형으로 그 대표적인 종단으로 대종교(나철, 1909)가 있으며, 현재 한얼교[신정일(申正一), 1965]를 포함하여 30여 개에 이르는 교단과 신행조직들이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 특정한 사상적 체계가 없이 태어난 종교들은 후에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이 유형에 속하는 종교단체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제3유형은 제1유형과 제2유형의 중간 또는 다른 종교와의 혼합형으로, 다양한 종교계통이 있다. 봉남계(奉南系)[김봉남(金奉南), 1898∼1950]에는 성덕도(聖德道)[김옥재(金沃載), 1952]를 포함하여 10여 개 교단이 있고, 각세도계(覺世道系)에는 각세도본관(覺世道本觀)을 비롯하여 8개 종단이 포함된다.

유교계는 갱정유도회(更定儒道會)[강대성(姜大成), 1930]를 위시하여 6개의 교단이 있고, 불교계 민족종교에는 주로 다양한 이름의 미륵종(彌勒宗)들이 있는 데, 1980년대 이후 이들은 불교종단에 가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끝으로 무속계에는 천우교(天宇敎)(무속인단체, 1988)와 천존(天尊)의 집[모행룡(牟幸龍), 1984]을 포함하여 많은 군소 종교단체들이 있다. 이처럼 제3유형에 속하는 종교들은 개벽관이나 단군사상 가운데 하나의 영향 아래서 사상적 성장을 이룬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3유형에 속하는 민족종교는 19세기 말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500여 종단이 존재하였으며, 현재도 200개 이상의 단체가 있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의 회원종단은 15개 이사종단과 30여 개의 회원교단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대순진리회, 태극도, 갱정유도 등 30여 회원 종단을 갖고 있어서 사실상 민족종교의 주세력이 이에 속한다.

모든 민족종교들은 미래의 이상사회에서 한민족이 주역이 된다는 신념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리고 종단 형성의 역사적 과정과 교세에 있어서 첫째 유형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한국민족종교들은 다같이 적극적 미래참여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의 사상적 특성은 민족주의적 개벽관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개벽관이 한국민족종교의 사상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민족종교가 역사적으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련은 일제가 씌운 유사종교(類似宗敎)라는 굴레였다. 1919년 3월 3일 문부성(文部省) 종교국(宗敎局)이 발표한 종교국통첩(宗敎局通牒) 제11호에 따르면, 신도교(神道敎), 불교, 그리고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이고, 공인되지 않은 채 마치 공인종교와 유사한 행동을 하는 종교를 유사종교라고 규정하였다. 공인종교는 문부성에서 관리했으며 유사종교는 경무국(警務局) 치안과(治安課)의 단속대상이 되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일본은 제국주의 국체를 보호 · 확대하는 데 유용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처럼 거부할 경우 일본의 국제관계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종교를 공인한 것이다. 즉,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이로운가 해로운가가 종교공인의 기준인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종교공인 그 자체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정치행위였지, 종교의 자질에 대한 합리적 · 객관적 판단이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조작된 개념일지라도 일단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쓰게 된 종교는 사회적으로 종교가 아니면서 종교의 허울을 쓴 단체, 즉 사이비종교(似而非宗敎)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민족종교는 사이비 또는 사교(邪敎)라는 용어로 언론과 사회에서 매도되었다.

음사사교(淫祀邪敎)는 원래 중국고전에서 사용된 용어로서, 왕조의 지배이념으로 채택된 유교의 전통에 어긋나는 종교적 신앙이나 행술을 뜻했다. 그러므로 이는 현대말로 하면, 유교가 그 교리적 입장에서 선언한 이단종교(異端宗敎)라는 뜻이다. 유교의 이단으로서의 사교란 근대국가 질서의 운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준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조작적인 개념들을 통해서 한국의 민족종교들을 사회로부터 말살하려는 정책을 일제가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현재도 한국사회에서 한국자생민족종교를 유사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우리가 일제의 문화정책의 영향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국역사의 주체는 우리 민족이고, 민족을 하나로 묶는 가치관은 민족애이다. 민족종교는 스스로 민족의 구원을 그 사명으로 삼고, 민족애를 종교적 신념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한마디로 민족종교는 민족애라는 가치관의 사회적 실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신념이 일제 시대와 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각각 다른 이유로 탄압을 받거나 평가절하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족과 국가가 존재하는 한 민족종교의 기능이 앞으로도 요청될 것이다.

참고문헌

『동경대전』
『용담유사』
『대순전경』(대순진리회출판부, 1982)
『정역(正易)』(김항, 정경학회, 1966)
『대종경(大宗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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