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구졸(九拙). 할아버지는 정랑 민유부(閔有孚)이고, 아버지는 판서 민성휘(閔聖徽)이며, 어머니는 판서 이의정(李義貞)의 딸이다. 승지 민주면(閔周冕)이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 진사가 되고 이듬해인 1636년 목릉참봉(穆陵參奉)으로 등용되었다. 그 뒤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직장(直長)·의금부도사를 거쳐 1646년 석성현감(石城縣監)이 되었다.
그때 호서지방에 도둑이 많아 양민들이 괴로움을 당하던 것을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특진되었다. 곧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였으며 상이 끝나자 성천도호부사(成川都護府使)가 되었다.
그때 청나라 사신 명수(命壽)가 그곳에서 행패를 부리므로 그를 잡아다 가두었다가 파직되었다. 다시 파주군수로 나아가 황폐된 이이(李珥)의 사당을 보수하는 등 선정을 베푸니 군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공덕을 기렸다.
그 뒤 양주군수를 거쳐 태안군수가 되어 힘을 기울여 황정(荒政)을 극복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내직인 첨지(僉知)·위장(衛長) 등을 거쳐 재령·한산의 지방관이 되어 청렴한 수령으로 널리 알려졌다.
죽산·남양·봉산 등의 수령으로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만년에 선영이 있는 곳에 움막을 짓고 벽에다 ‘爛柯齋(난가재)’라는 편액을 걸어놓고 시서(詩書)를 탐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