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목양(木羊).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치운(致雲)의 차남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金祭)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한학을 익힌 후 부산보통학교(1922년), 평양동명학원(東明學院) 고등부(1925년)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만주 안동(安東)에 있던 일본인 목공예가 다케이시쇼비(武石壯美) 사숙에 입문하여 5년 동안 목조와 공예를 익혀 목공예가의 바탕을 쌓고, 1942년부터 두 번 연속 선전[朝鮮美術展賢會]에 입선하여 공예가로 등단하였다.
광복 직후 서울로 월남하여 최순우(崔淳雨) · 박수근(朴壽根) 등과 교우하며 작품생활에만 전념하였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부터 국전에 계속 출품하였으며, 이후 추천작가 · 초대작가로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 · 신인예술상전 · 동아공예대전 · 불교미술전 · 신라미술대상전 등 중요 공모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58년 한국판화협회 창립회원으로 잠시 목판화에 손을 대기도 했으나, 1966년 ‘목양공방’을 새로 짓고 목공예 창작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동안 공예작가동인전(1955년) · 대한미술협회전(1956년) · 일본국제자유전(1961년) · 상공미전(1972년) · 공예가초대전(1974) 및 국립현대미술관의 각종 기획초대전과 한국공예가회전 등 많은 주요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며, 서울시문화위원(1954년) · 문화재전문위원(현, 문화유산전문위원)(1973년) · 한국미술협회고문(1973년) · 한국공예가회고문(1984년)을 역임하고, 서울시문화상(1960년)과 은관문화훈장(1982년)을 받았다.
철저한 장인(匠人) 기질의 성향이 잘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완벽한 재료의 선택과 건실한 구조 · 제작기술을 우선으로 한 실용적 가구가 대부분인데, 만년의 작품에서는 목재의 자연적 형태와 색채 · 나뭇결을 최대한 활용한 자연주의적 낭만과 해학이 곁들여진다.
조선조 목가구의 뛰어난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으로 전통공예의 우수성을 계속 탐구했고, 광범한 국산목재의 수집 · 활용에 대한 연구와 세대를 초월한 격의 없는 열성적 대화는 후진 목공예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만년에는 제주도에 ‘제주토속민예연구원’을 차리고, 후진들을 위해 개방할 공예공방 개설계획을 추진하려던 중 지병으로 타계하여 경기도 파주의 나사렛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