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훈지(勳之), 호는 송촌(松村). 아버지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박사화(朴士華)이며, 어머니는 현감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주동의 효아(鑄洞孝兒)’라는 칭송을 받았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부모를 정성껏 받들어 봉양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아버지가 죽자, 남양(南陽)에 있는 무덤 밑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를 하면서 3년 동안 죽만 먹고 애통하게 지내니 고을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을 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해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을 하고는 그대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19년(중종 14)에 문명이 널리 알려지자 조광조(趙光祖) 등이 별과(別科)에 천거하였는데,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조정에서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에 임용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