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응휴(應休). 충주 출신. 아버지는 박무(朴懋)이다.
1594년(선조 2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7년 주서(注書)가 되고 사관(史官)·병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어 납속인(納粟人) 이춘란(李春蘭)에게 상직으로 태천현감(泰川縣監)을 제수하자 그의 무식함을 들어 취소할 것을 주장하고, 또 간리(奸吏)들의 모리행위를 지적, 그 폐해를 제거할 것을 간(諫)하였다.
이어서 헌납(獻納)이 되어 회령부(會寧府)는 육진의 중심이 되는 곳이므로 야인(野人)들을 능히 통활 할 수 있는 당상관으로 수령을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경상도관찰사에 이시발(李時發)이 거론되자 그가 충청도관찰사로 재직 중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민심을 잃고 원한을 많이 샀던 점을 들어 부적함을 주장하였다.
박승업은 동인(東人)이 남·북인으로 갈라질 때 북인으로, 다시 북인이 대·소북으로 분열할 때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과 함께 소북이 되었는데, 1600년 경기도사(京畿都事)로 재직 중 당론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하여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1607년 함양군수로 복직된 뒤 지평(持平)·장령(掌令)·겸필선(兼弼善)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