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3년(세종 15) 부사직(副司直)으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의 막하에서 건주야인(建州野人)을 정벌하였다. 1440년에 경원첨절제사(慶源僉節制使)가 되고, 1443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전라도병마절제사, 이듬해 전라도절제사·전라도처치사(全羅道處置使) 등을 역임하였다.
1449년 모친의 상중이었으나 달달족(達達族)의 침입에 대비, 왕명에 따라 판영변도호부사(判寧邊都護府事)로 기복(起復: 상 중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관직을 수행함)되었다. 이듬해 황해도병마도절제사에 이어 공조참판에 올라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문종 2) 평안도절제사가 되었는데 이듬해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변경을 맡을 최적임자라 하여 계속 근무하다 중추원사로 들어왔다. 이 때 계유정난으로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하여 그의 당료(黨僚)라 하여 함경도 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과 함께 파직되고, 무안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연일(延日)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교살당하였으며 그 가족들도 남해의 고도에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