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령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부사직, 경원첨절제사, 전라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53년(단종 1)
주요 관직
부사직|경원첨절제사|전라도절제사
관련 사건
계유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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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전기 부사직, 경원첨절제사, 전라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1433년(세종 15) 부사직(副司直)으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의 막하에서 건주야인(建州野人)을 정벌하였다. 1440년에 경원첨절제사(慶源僉節制使)가 되고, 1443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전라도병마절제사, 이듬해 전라도절제사·전라도처치사(全羅道處置使) 등을 역임하였다.

1449년 모친의 상중이었으나 달달족(達達族)의 침입에 대비, 왕명에 따라 판영변도호부사(判寧邊都護府事)로 기복(起復: 상 중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관직을 수행함)되었다. 이듬해 황해도병마도절제사에 이어 공조참판에 올라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문종 2) 평안도절제사가 되었는데 이듬해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변경을 맡을 최적임자라 하여 계속 근무하다 중추원사로 들어왔다. 이 때 계유정난으로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하여 그의 당료(黨僚)라 하여 함경도 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과 함께 파직되고, 무안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연일(延日)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교살당하였으며 그 가족들도 남해의 고도에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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