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헌부집의, 시강원필선, 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정(子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4년(명종 19)
사망 연도
1622년(광해군 14)
본관
고령(高靈)
주요 관직
사헌부집의|시강원필선|홍문관부응교
관련 사건
김제남 역모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사헌부집의, 시강원필선, 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정(子貞). 박조(朴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영석(朴永錫)이고, 아버지는 박대용(朴大容)이며, 어머니는 조경운(趙慶雲)의 딸이다. 형이 형조판서(刑曹判書) 박건(朴楗)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2년(선조 35)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606년 감찰, 이듬해 공조좌랑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고, 이어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문학을 거쳐, 161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듬해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고, 1614년에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겸하였다.

1615년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이어 사간이 되었으며, 김제남(金悌男)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궁자(弓子) 1정(丁)을 하사받았다. 1617년 정사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부사(回答副使)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피로인(被虜人) 321명을 인솔해왔다. 일본 사행을 다녀오고 나서 『동사일기』라는 사행록을 남겼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618년 행호군(行護軍)이 되었고, 이어서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