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부(明夫). 아버지는 박인수(朴麟壽)이다.
무신 집안 출신으로 1584년(선조 17) 무과 급제, 비변사(備邊司)에서 근무하다가 1589년 심수경(沈守慶)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에 밀양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4월에 왜적이 침입해 부산·동래 등이 차례로 함락되는 와중에서 작원(鵲院)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 패해 포위되자, 밀양부(密陽府)를 소각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나머지 병사를 수습하고, 군사를 나누어 소규모의 전투를 수행해 적세를 저지하였다.
같은 해 8월 영천의 민중이 의병을 결성하고 영천성(永川城)을 근거지로 해 안동과 상응하고 있는 왜적을 격파하려 하자, 별장 권응수(權應銖)를 파견, 그들을 지휘하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안강에서 여러 장수들과 회동하고 16개 읍의 병력을 모아 경주성(慶州城)을 공격했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한달 뒤 군사를 재정비하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해 경주성을 다시 공략해 많은 수의 왜적을 베고 성을 탈환하였다.
이 결과 왜적은 상주나 서생포로 물러나야만 했고, 영남 지역 수십 개의 읍이 적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공으로 선조로부터 양피의(羊皮衣)가 특별히 하사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당시 피난 중에 행재소(行在所)의 호위 문제를 중시하던 선조는 박진의 전과를 감안해 불러 올려 부원수로 임명해서 여러 장수들을 독전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신들이 박진이 각 도에서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고, 영남을 회복한 것도 박진의 공이므로 민심을 고려할 때 불가하다고 상주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왜적과 싸운 장수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의 하나였다. 1593년에 독포사(督捕使)로 밀양·울산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1594년 2월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같은 해 10월 순천부사, 이어서 전라도병마절도사, 1596년 11월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내고 뒤에 참판에 올랐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1736년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