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화태(花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였다. 같은 해 4월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31년 6월 4학년 재학중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하였다. 이후 용산제면회사 · 대창직물 · 대창고무공장 등에 노동자로 취직하여 노동운동에 몰두하였다.
1931년 12월 ‘경성학생RS협의회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약 2년간 수감생활을 마치고 1933년 11월 예심에서 면소(免訴)를 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광복 무렵까지 네 차례에 걸쳐 투옥과 출옥을 반복하였다. 1934년 초 이재유(李載裕)그룹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관련, 재검거되었다.
같은 해 5월 풀려나 이재유와 함께 살면서 적색노동조합운동에 투신하였다. 1935년 1월 용산적색노조사건에 연루되어 1936년 7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7년 5월 옥중 출산으로 석방되었다. 같은 해 7월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 간부인 이관술(李觀述)과 연락을 취하며 활동을 재개하다 재검거되었다.
1938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39년 중반 풀려났다. 이후 경성콤그룹에 관여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며, 1944년 10월 출옥하였다. 출옥하자마자 국문학자이자 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 담당자이던 김태준(金台俊)과 결혼하였다. 1944년 11월 김태준과 함께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국내 군사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연안(延安)으로 출발하였다.
1945년 4월 연안에 도착했으나 이후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걸어서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부녀부 간부로 활동했다. 조선부녀총동맹에 참가하여 문교부장 겸 서울지부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고, 사회정책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월북하여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