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화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혁명당 간부들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던 신빈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박치화(朴致華)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5년(고종 32)
사망 연도
1932년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
관련 사건
신빈사건
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혁명당 간부들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던 신빈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명은 박치화(朴致華). 평안북도 의주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주로 남만주일대에서 활약한 조선혁명당과 그 당군(黨軍)인 조선혁명군에서 활약하였다.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이 10월에 들어 조선혁명당과 군을 공격하자 조선혁명당의 조직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혁명당은 12월 17일 중국 신빈현(新賓縣) 하북(河北)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조직이 새롭게 개편되었는데, 이때 이호원(李浩源) · 양하산(梁河山) · 김보안(金輔安) · 김관웅(金寬雄) · 고이허(高而虛) · 김학규(金學奎) 등 15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1월 상순에는 조선혁명군사령부 부관장(副官長, 또는 機要秘書)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월 19일 아침, 회의장이 중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이호원(조선혁명당중앙집행위 원장) · 김관웅(조선혁명군사령) · 장세용(張世湧, 부사령) · 이종건(李鍾建, 국민부공안국장) · 이규성(李奎星, 경위대대장) 등 요인 10여 명과 함께 체포당했는데, 이를 신빈사건(新賓事件)이라 한다.

체포 뒤 퉁화[通化] 주재 일본영사관으로 끌려가서 악형을 받은 끝에 순국하였다.

상훈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2 -진광-(독립기념관, 1988)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국회도서관, 1976)
『독립운동사』 5·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1979)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동아일보(東亞日報)』
집필자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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