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출신. 이명은 철형(喆衡). 1907년 9월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장이었다.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9월에 전라남도 장성에서 기삼연(奇參衍)을 중심으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가 결성되자, 진사였던 이철형은 군사를 이끌고 이에 합류하여 중군장이 되었다.
기삼연 · 김용구(金容球) · 전수용(全垂鏞) · 이석용(李錫庸) · 김준(金準) · 이남규(李南奎) 등의 중심인물과 함께 국민들의 항일 투쟁을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로 발송하는데 참여하였다.
이어서 11월 3일 전라남도 영광군 진량면(陣良面) 산하치(山下峙)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법성포에 이르러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10여 명을 사살하고 일인 거주 가옥 10여 채와 무기를 불태웠다.
11월 19일에는 김용구 등과 함께 다시 영광읍성 남문을 공격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성곽이 견고하여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1908년 1월 19일에는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였으나, 쌍방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1909에 들어서는 전라남도 영광군 외동면에서 네 차례에 걸쳐 군자금 36원과 당목(唐木) · 백목(白木) 등 2필을 모집하였다.
이처럼 이철형은 1907년 9월 이후 1909년 1월까지 장성 · 함평 · 영광 · 고창 일대에서 일본군과 투쟁하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다가, 6년 7개월로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