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청원(淸源). 할아버지는 박한(朴捍)이고, 아버지는 별제(別提) 박영무(朴英珷)이다. 어머니는 직장(直長) 정인걸(鄭仁傑)의 딸이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서 출생하였다.
1556년(명종 11)에 23세로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임명된 이후 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정평부사(定平府使)·종성부사(鍾城府使) 등 외직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서 왜적의 선봉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본진을 소각하고 죽령(竹嶺)으로 후퇴, 적을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령(鳥嶺)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한성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뒤라 행재소(行在所)로 찾아가던 중,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만나 좌위대장(左衛大將)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 참여하였다. 이어 신길(申硈)·유극량(劉克良) 등과 함께 병사를 나누어 파주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해 평양으로 탈출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뒤, 사헌부를 위시한 조신들로부터 영토를 지켜야 할 신하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군율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때가 전시이고 또 후퇴하던 과정에 종군한 것이 감안되어 처벌을 면하였다.
같은 해 6월에 평양이 함락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과 함께 평산으로 들어가 병사를 모으고 있던 중, 당시 이천(伊川)에 있던 세자의 명을 받고 세자를 호위 시종하면서 성천으로 들어갔으며 우위대장·의용도대장(義勇都大將)에 임명되었다.
그 뒤 평양 방면으로 나아가 여러 차례 왜적과 접전했으나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다. 1593년 1월에 평양이 수복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까지 종군하였다. 그러나 지병이 재발해 치료를 위해 귀향하던 중 사망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