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온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헌릉참봉,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옥여(玉汝)
금서(錦西)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65년(세조 11)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
주요 관직
헌릉참봉|사간원정언
관련 사건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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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헌릉참봉,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옥여(玉汝), 호는 금서(錦西). 의원이었던 방사량(房士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방구성(房九成)이고, 아버지는 사정(司正) 방계문(房戒文)이며, 어머니는 정존(鄭存)의 딸이다. 여러 대에 걸쳐 나주에서 살았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95년(연산군 1) 증광시에서 진사가 되었다. 1517년(중종 12) 전라도관찰사 조원기(趙元紀)의 천거를 받았는데, 방귀온이 효행(孝行)이 있고 부모 상례를 잘 치렀으며, 정심(正心)·정도(正道)를 지킨다는 것이 천거의 이유였다. 이에 1518년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3등으로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가 같은 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되었다. 1538년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의 상소로 인하여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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