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회보(晦甫), 호는 안촌(安村). 증 제용감정(贈濟用監正) 배윤문(裵潤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형조참의 배유(裵裕)이고, 아버지는 배무원(裵茂元)이며, 어머니는 서산정씨(瑞山鄭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정희장(鄭希章)의 딸이다. 정구(鄭逑)와 교유하였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76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랑을 거쳐 청도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웠다. 군사 1,000명을 모아 ‘야격군(野擊軍)’이라 하고 박경전(朴慶傳)을 대장(代將)으로 삼아 왜적 수백 명을 포획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595년(선조 28) 순천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천거로 나주목사가 되어 금산을 수비하였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요청으로 후퇴하는 적의 퇴로를 막아 분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감사 황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우찬성 심희수(沈喜壽)와 부마(駙馬) 서경주(徐景霌) 등의 상소로 곧 석방되었다. 1601년 대구부사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였다.
그 뒤 영천(榮川)에 머물며 김륵(金玏)·김우옹(金宇顒)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강론하는 등, 제현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일찍이 유성룡과도 교유하였는데, 배응경의 박학함에 유성룡이 탄복하였다 한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안촌집(安村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