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백기(伯起). 아버지는 현감 배인범(裵仁範)이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결성(結城)·장흥(長興)·흥양(興陽)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도순찰사(都巡察使) 정언신(鄭彦信)과 함께 이탕개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선략장군(宣略將軍)의 품계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흥양현감(興陽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명에 따라 전함을 많이 건조해 전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등의 해전에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였다. 사천(泗川) 해전에서는 원균(元均)의 후부장(後部將)으로 이순신(李純信)·김득광(金得光) 등과 함께 참전하였다.
이어서 한산도(閑山島)·부산포(釜山浦)·웅천(熊川) 해전에 참전했으며, 1596년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다. 재임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漆川粱)·노량(露梁) 해전에 조방장(助防將)으로 참전해 공을 세우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진하였다.
특히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도수군절도사 최호(崔湖)가 전사하고 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마저 도망하자 전선을 도맡아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1600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듬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03년 공신도감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을 택정할 때 이순신(李舜臣)·원균과 함께 26인의 명단에 올랐으나, 그 뒤에 확정된 18인에는 들지 못하였다. 1604년에는 왜란 중에 세운 공로로 무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어서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7년 총관(摠管)으로 영흥대도호부에 부임했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 당시 지휘관이던 이순신(李舜臣)의 장계(狀啓)에 권준(權浚)·이순신(李純信)·정운(鄭運)과 더불어 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 일컫고 논공행상할 것을 조정에 품의한 바 있었다. 뒤에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숙(孝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