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미(海美). 호는 풍암(楓巖). 태인(泰仁) 출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당상관에 올랐다. 당시 정여립(鄭汝立)의 권세가 높아 도내(道內)의 문무사류(文武士類)가 모두 이와 결탁하려 하였으나 백광언만이 동조하지 아니하여 미움을 받아 번번이 수령 임명에서 제외되었다. 1589년(선조 22)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재직할 당시 정여립과 대립하던 조헌(趙憲)이 길주(吉州)로 유배를 떠나자 세상 사람들이 정여립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위문하지 않았다. 조헌이 마침 북청의 경계를 지나자 백광언은 직접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정여립을 비판하였는데 얼마 후 정여립이 모반 사건으로 죽음을 당하자 세상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을 칭송하였다.
1592년 모친상을 당하여 태인에 머무르고 있는 중에 임진왜란을 만나 전라감사 겸 순찰사(全羅監司兼巡察使) 이광(李洸)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때 이광이 전라도병사 8,000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북상했다가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군하여 전주에 이르자 백광언은 “군부(君父)께서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셨는데 공은 수하에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퇴군하여 싸우려 하지 않으니 이 무슨 연고이시오.”라고 꾸짖어 북상할 것을 약속받고 다시 2만 여의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한 뒤 수원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용인성(龍仁城) 남쪽 10리에 이르러 우군선봉장이 된 백광언은 좌군선봉장 이지시(李之詩)와 함께 문소산(文小山)의 적진을 협공하였으나 패전하여 모두 전몰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여세를 몰아 서울을 수복할 것으로 기대하였던 행재소(行在所)에서는 패전소식을 들은 뒤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였다. 1834년(순조 34)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모충사(慕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