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감백자는 자토만 감입하나 고려시대의 상감백자에서는 자토 외에도 청자태토가 감입되기도 한다.
고려의 상감백자는 그 완형유품이 드물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상감모란문매병(보물, 1963년 지정)과 개성 부근 출토의 백자상감보상화당초문합(白磁象嵌寶相華唐草文盒) · 백자상감국화문합(白磁象嵌菊花文盒) · 백자상감국화문잔(白磁象嵌菊花文盞) 정도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12세기 중엽에 속하는 예이다.
고려 상감백자의 요지는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파편들이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15세기경까지 제작되었던 상감백자는 유태(釉胎)로 보아 두 종류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고려백자의 유태를 지닌 얇은 기벽(器壁)의 것으로서 연질의 태토에 미세한 빙렬(氷裂)이 있는 백자유가 얇게 입혀졌고, 문양은 선상감의 유연한 당초문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종류는 중국 원 · 명 백자의 영향을 받은 경질태토의 백자로 회청색의 유약이 입혀졌으며 빙렬이 없고, 문양은 선과 면으로 구성된 연당초문이 주류로서 힘이 강하고 거칠다.
상감백자는 문양과 기형에도 당시 유행했던 분청사기(粉靑沙器)의 영향을 받아 분청사기와 백자의 복합적인 성질을 지닌 백자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는데, 태토는 백자이면서 문양은 분청사기의 그것과 동일한 예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상감승렴문호(白磁象嵌繩簾文壺)를 들 수 있다. 이 항아리는 표면이 약간 거칠기는 하나 청색이 감도는 유약이 굽언저리에까지 입혀져 있는 백자인데, 상반부에 문양띠가 있다.
즉, 상단에 커다란 인화국문(印花菊文)이 한 줄 있고, 하단에는 주문양으로서 승문이 있어 당시 분청사기에서 흔히 보이는 의장을 갖추고 있다.
이와는 달리 유약과 태토의 질이 다른 ‘太一殿(태일전)’명 탁잔이나 ‘成化丙戌(성화병술)’명 묘지와 함께 출토된 1466년경의 백자상감초화문편호(白磁象嵌草花文扁壺) 같은 연질백자는 자유로운 필치의 선상감으로 문양을 새기고 있어 같은 시기의 분청사기와 비슷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유약 표면의 질감에 있어서는 정제된 분청사기분장문(粉靑沙器粉粧文)과 구별이 애매한 예도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제3요지에서는 백자에 분청사기의 문양요소를 갖춘 파편들이 발견되었고, 분청사기에 흔히 나타나는 ‘內贍(내섬) · 禮賓(예빈)’ 등의 명문이 있는 백자파편들 또한 수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광주관요(廣州官窯)가 중앙관요로서 활동하기 이전에,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이는 전국 분포의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 일부에서 초기의 상감백자가 제작되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기형도 분청사기의 특징적인 형태가 많아 앞에서 이미 예를 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상감승렴문호와 같이 복부가 불룩하고 납작한 항아리나 편호, 그리고 몸체 밑에 중심이 있는 소위 ‘옥호춘(玉壺春)’ 병 등이 있다.
대접의 경우는 양감이 풍부한 성기(盛期)의 것보다 다소 양감 · 안정감이 결여된 것도 있어 백자상감의 기형은 분청사기의 성쇠와 더불어 시대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백자 특유의 조형미를 살려나가고 있다.
이와 같이 백자상감은 15세기 전성기를 통해 당시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던 분청사기와 더불어 그 운명을 같이하였다.
백자상감의 골격이 되는 연질 또는 경질의 태토 중 전자의 연질백자는 15세기 말경에 소멸되고, 한층 견고한 태질의 회청색유가 입혀진 초기 경질백자는 그 이후에도 계속 제작되어 문양은 없어졌으나 조선백자의 근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