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륭사 금당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는 벽화이다. 고구려 출신 승려 화가 담징(579∼631)이 일본의 법륭사 벽에 그렸다고 한다. 금당 벽에는 석가정토·아미타정토·약사정토·미륵정토와 여러 보살도 등이 그려져 있다. 이들 벽화는 각기 다른 작가들이 나누어서 그렸다. 이들 벽화에서 인도나 중앙아시아, 중국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사방불 사상이 나타난 점으로 보아 한국계 화가의 참여 가능성도 높다. 일본에서 고구려 담징 작이라고 구전되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그러나 호류사(法隆寺)의 금당벽화는 금당의 건립 연대, 벽화의 제작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본래 호류사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598년설과 606년설로 엇갈리고 있으나 7세기 초에는 이미 건립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일본학계에서는 690년 낙뢰로 말미암아 호류사가 불타 버린 뒤, 재건되었다는 주장(再建論者)과 재건되지 않았다는 주장(非再建論者) 사이에 논쟁이 뜨겁다. 그리고 재건 연대에 관하여서도 덴무 연간(天武年間, 673∼68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설과 지토 연간(持統年間, 687∼696년)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실시된 탑지 발굴(塔址發掘)과 1939년에 실시된 호류사 후몬원(普門院) 뒤편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의 발굴을 통하여 호류사는 본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재건되었다는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호류사의 금당은 수리하던 중 1949년 1월 26일 화재가 일어나 내진(內陳) 위쪽 소벽(小壁)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 버렸다.
따라서 호류사의 금당벽화에 대한 연구는 불타 버리기 전에 찍어 두었던 사진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호류사 금당의 평면 구성은 외진(外陳)과 내진으로 구성된다. 금당의 중앙부에 수미단(須彌壇)이 자리한다. 이 수미단을 10개의 두리기둥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내진이라고 한다.
이 10개의 두리기둥은 다시 각각 사각기둥이 2등분되어 모두 20개의 작은 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는 벽면마다 비천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비천도는 해체 수리 중에 일찍 분리되어서 화재를 면하고 그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정면(남쪽 면) 5칸, 측면 4칸으로 역시 18개의 두리기둥으로 이루어진 외진은 남쪽 문이 3개, 나머지 동쪽 · 서쪽 · 북쪽은 각각 1개씩의 문이 나 있어 벽면은 모두 12개소가 된다.
이 외진의 벽에는 석가정토(釋伽淨土, 동벽) · 아미타정토(阿彌陀淨土, 서벽) · 약사정토(藥師淨土, 북벽의 동쪽) · 미륵정토(彌勒淨土, 북벽의 서쪽)와 여러 보살도 등이 그려져 있다. 이들 벽화는 공통적인 시대 양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벽면에 따라 각기 다른 작가들이 나누어서 그렸던 것 같다.
호류사 금당벽화에는 인도나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 당대(唐代) 미술의 영향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즉,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중앙아시아적인 채색법이나 철선묘(鐵線描)를 위주로 한 묘법(描法) 그리고 이른바 우리 나라에서 유행한 사방불(四方佛) 사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호류사 금당벽화에 한국계 화사씨족(畫師氏族)의 참여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일본의 『반구고사편람(班鳩古事便覽)』에서 백제계(百濟系) 지리불자필(止利佛子筆)이라고 기록된 사실이나 고구려 담징 작이라고 구전되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여 주는 한 예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