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서울 출생. 경기상업학교를 거쳐 1943년 일본의 데이코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1945년 해방기념미술전에 참가했고, 일찍부터 서구의 현대미술 사조에 공명하여 야수파 내지 입체파 경향의 작품을 시도하여 1949년 첫 개인전 때부터 그러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 변영원의 현대적 작품은 낙선되었다.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선·광(光)-빌딩을 구성하는 주체」로 명제된 작품이 입선하며 주목을 끌었다. 그 작품은 국전에서 볼 수 있었던 최초의 순수 비구상(非具象) 작품이었다. 그러나 제3회 국전에서 또다시 낙선되자 그 뒤로는 고독한 순수 현대주의 화면 창작에 홀로 전념했다.
1955년에는 한국에서의 ‘바우하우스(Bauhaus)운동’의 필요성을 제창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그 뜻을 같이한 조병현(趙炳賢), 김관현(金寬鉉), 황규백(黃圭伯), 변희천(邊熙天), 이상순(李商淳), 손계풍(孫啓豊) 등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7명이 모여 ‘추상 미술과 산업의 결합’을 내세운 ‘신조형파(新造型派)’ 그룹을 창립하고 같은 해 6월동화화랑에서 신조형파미술전을 개최하였다. 이후 신조형파전은 김종하(金鍾夏), 이철이(李哲伊), 문철수(文喆守), 정건막(鄭健漠) 등이 가담하면서 1959년 3회전까지 개최되었지만 이후 내부 갈등으로 중단되었다.
그 시기에 변영원은 「직기(織機) 공장의 백주(白晝)」, 「오브제」, 「자유승리」 등의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의 작품을 발표했다. 1960년 개인전 때에는 자신의 추상 예술론으로 「색과 선의 신조형」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어서 직선 구성의 추상과 초현실주의적인 심상(心象)의 그림을 추구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이론적 귀착으로 동양의 음양사상에 입각한 우주만상(宇宙萬象)의 ‘합존조형(合存造形)’ 작업에 이르렀다.
‘합존조형(合存造形)’은 변영원이 병실에서의 투병생활을 거치며 생사(生死)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구상한 작업으로서, 푸르고 깊은 우주적 공간에 신비한 생명감을 표출하는 빛과 색으로 크고 작은 동그라미와 성운(星雲)을 표현하면서 ‘존재와 본질의 아름다운 융합’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변영원은 묵묵히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단의 충분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한국전쟁 중에 제작한 것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연상시키는 「반공여혼(反共女魂)」(1952)과 「합존(合存)」 시리즈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