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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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학
개념
병의 원인과 발생 과정, 그리고 병에 걸린 조직의 형태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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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병의 원인과 발생 과정, 그리고 병에 걸린 조직의 형태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내용

의학을 기초 의학과 임상 의학으로 나눌 때 병리학은 기초 의학에 속하면서 임상 의학에 관여하며, 기초 의학과 임상 의학의 가교 역할을 한다.

병리학의 역사는 인간이 사망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하여 시체의 해부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죽은 자의 해부를 통해 정상 조직의 구조가 밝혀지면서 해부학이 발달한 것처럼, 병리학은 병들어 죽은 자의 해부를 통하여 병든 조직이 정상 조직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병리 해부, 즉 부검은 동양문화권보다 서양문화권에서 훨씬 적극적으로 시행되었고 16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이에 대한 많은 지식이 축적되었다. 1700년대에 현미경의 출현과 함께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가 눈에 보이게 되면서 1800년대에 이르러 병리해부학은 더욱 과학화하였다.

1880년에는 독일의 비르효(Virchow)에 의해 모든 세포는 세포에서 유래한다는 이른바 세포병리학(Cellular Pathology)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이는 이후 현대 병리학 뿐 아니라 현대 의학의 기본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현대 의학적 개념의 병리학에 대한 기록은 조선조 이전에는 없다. 조선조에 와서도 일부 한의사들이 사람이 죽은 뒤 오장육부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당시의 유교적 사회체제에서 신체를 해부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결국 우리 나라의 병리학은 한말에 가서야 우리보다 먼저 서양 의학을 받아들인 일본을 통해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즉, 1913년 8월 일본인 교수 이나모도(稻本)가 조선총독부병원 병리부에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교토대학 병리학 교수였던 그는 우리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병리 부검을 시행하고 현미경으로 병든 조직을 검사하는 한편, 당시 총독부의학강습소(경성의학전문학교 전신)에서 병리학 강의를 하였다.

한편, 병원에서의 병리학 업무가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13년 미국인 의사 밀스(Mills)에 의해서였다. 그는 병리학자는 아니었으나 선교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면서 환자로부터 나온 검체의 미생물 및 기생충 검사를 처음 실시하였는데, 이는 병원 병리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병리학이 우리 나라에 일단 도입은 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그 발전은 아주 미미하였다. 전문학교 체제를 갖춘 최초의 의학 교육기관이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그리고 당시의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한국인의 기초 의학 참여는 미미한 수준이었고, 일본인들 틈에 끼어 제한적 연구와 교육이 수행되었다.

다만 1928년 최초의 한국인 병리학자 윤일선(尹日善)이 교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병리학 조교로 부임한 것은 우리 나라 병리학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후 윤일선 교수가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옮겨 초대 병리학교실 주임 교수로 취임한 이래 광복 때까지 순수 한국인들만으로 이룩한 병리학 업적은 비록 일제 강점기간이었으나 우리 나라 병리학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흩어져 활동하던 몇 명 되지 않는 병리학자들이 모여 1946년 10월 처음으로 대한병리학회(당시 조선병리학회)를 창립하였다. 창립회원은 윤일선·이제구·이응열·정창수·김영제·김동식·홍석재·박우균·남창춘·안부호·구국회 등 12인이었다.

이들은 광복 전에 경성제국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등에서 병리학 연구를 하였던 인물들로서 우리 나라 병리학의 선조가 되었다.

1949년부터 대한병리학회를 주축으로 우리 나라 병리학의 연구가 시작되고 학교마다 병리학 강좌가 설치되어 운영되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우리 나라 병리학에 큰 변혁을 안겨 주었다. 일본식 병리학에만 젖어 있던 우리 나라 병리학에 미국식 병원병리학이 접목된 것이다.

즉 기초 의학으로서의 병리학이 아니라 매일 병원으로 출근하여 환자의 조직 소견을 판독하고 진단하며, 사망하는 경우 바로 부검하여 그 사인을 놓고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이른바 병원병리학의 개념이 집중 도입되었다.

전쟁 후 대한병리학회는 병원병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1963년 병리 전문의 제도를 만들어 인턴 후 4년간의 병리 수련을 마친 다음 자격 시험을 거쳐 해부병리 전문의와 임상병리 전문의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 현재 우리 나라에는 약 500명의 해부병리 전문의와 500명의 임상병리 전문의가 모든 중요 종합병원에서 검사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순수 기초 병리학 종사자 약 100명을 더하면 우리 나라의 병리학 인구는 약 1,100명이다.

병리학 분야의 유일한 국내 학술지인 ≪대한병리학회지≫는 1959년 창간된 이래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월간으로 발간되고 있다. 해마다 봄·가을 학술대회가 열리고, 가을 학술대회에서는 보통 300여 연제가 발표되며 국제병리학회 행사도 국내에 유치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동안 대한병리학회로부터 임상병리학회와 세포병리학회가 분리 독립하였고, 회원들은 기타 의학 관련 학회의 공동회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병리학은 시작에서부터 해부학과 미생물학의 밀접한 관계 속에 발전해 왔다. 즉, 병의 형태 변화와 병의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독립되었고, 20세기를 거치면서 의학의 주요 분야로 자리잡았다.

세포병리학으로 현대 의학을 선도한 병리학은 지금도 병의 원인과 발병 과정을 연구하는 기초병리학과 병원에서 환자의 조직이나 세포의 형태학적 변화를 검사하는 병원 병리학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기초병리학은 분자생물학적 기법 등에 힘입어 분자병리학으로 발전되었다.

앞으로도 우리 나라의 병리학은 이렇게 두 갈래로 발전할 것이다. 처음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병리학은 현재도 현대 의학의 중심에 서서 기본 연구에 열중하면서 임상 의학과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대한병리학회 50년사』(대한병리학회, 아카데미아, 1996)
「Introduction and Development of Pathology in Korea」(Chi J. G., 『日本醫史學雜誌』 45,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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