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원고 ()

목차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의 관청.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관청.
내용

궁중의 귀중품을 보관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설치시기는 1369년(공민왕 19)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죽음으로 슬픔이 커진 공민왕(恭愍王)이 신하들과 함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인희전(仁熙殿)에 천수도량(千手道場)을 베풀면서, 이 때 덕천고(德泉庫)·연덕궁(延德宮)·영화궁(永和宮)·영복궁(永福宮)·영흥궁(永興宮)과 함께 여기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보원고에는 별도로 해전고(解典庫)를 설치하여 재원을 보강하였다. 그 뒤 공민왕이 죽은 뒤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그 밖에 기우단(祈雨壇)을 설치하여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 왕실과 관련된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재원이 부족해져 실질적인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집필자
이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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