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한암(閑庵). 마곡사(麻谷寺)의 승려였다. 1245년(고종 32) 12월 『능엄경(楞嚴經)』을 널리 펴려는 서원(誓願)을 세웠고, 1264년(원종 5)√「구결도우문(求結道友文)」을 발표하여 스스로 깨달은 『능엄경』의 참뜻을 영원히 전법(傳法)할 결의를 보였다.
그 뒤 영산현(靈山縣) 봉귀사(鳳歸寺)에 머물면서 대장경(大藏經)을 열람하다가, 1265년 영산현 귀로암(歸老庵)이 낙성(落成)되자 주지 각환(覺幻)의 청에 따라 『능엄경』을 강설하였다.
이때 『능엄경산보기(楞嚴經刪補記)』 2권과 『능엄경신과(楞嚴經新科)』 2권을 저술하여 『능엄경계환요해(楞嚴經戒環要解)』의 잘못된 점을 정정하였다.
이 중 『능엄경산보기』는 목암화상(睦庵和尙)인 일연(一然)의 교열을 받았고, 『능엄경신과』는 1276년(충렬왕 2) 그가 강양(江陽) 몽계사(夢溪寺)의 능엄도량(楞嚴道場) 주맹(主盟)이 되었을 때 그곳에 참여했던 희종의 넷째아들 경지(鏡智)가 크게 주목하여 간행하였다.
그 뒤 호주(湖洲)의 개심사(開心寺)에 있다가 1278년 왕명으로 백련사(白蓮社)에서 능엄법회를 열어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1279년 충렬왕이 경상수보도감(經像修補都監)에 명하여 『능엄경산보기』 2권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평생을 『능엄경』 연구에 바쳤으며, 오늘날 『능엄경』이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된 것은 그의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 저서인 『능엄경신과』와 『능엄경산보기』는 현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