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음(河陰). 자는 상지(祥之) 또는 이선(履善). 연안(延安) 출신.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07년(중종 2) 식년시에서 생원이 되었다. 1517년 생원으로서 시정책 10개를 건의하자 중종이 이를 채택하였으며,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광조 등은 봉천상을 옹호한 반면 일부에서는 시세(時勢)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여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앞서 제향에 쓰는 잣[海松子]을 모두 이로 까기 때문에 침이 묻어 불결해지는 문제가 있었는데, 봉천상이 쇠집개[鐵鉗]를 창안, 제작하여 집개 속에 잣을 넣고 압착하여 까게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고 전한다.
1519년 기묘사화에서 조광조의 일당으로 연좌되어 삭탈관직당하고 고향 배천(白川)으로 내려갔다. 이후 1521년에 다시 안사련(安祀連)의 고변에 의한 신사무옥에 관련되어 좌의정 안당(安瑭) 및 그의 아들 안처겸(安處謙) 등과 함께 변란을 모의하였다는 죄로 가산이 적몰되고 능지처참되었다. 인종 때 연좌되었던 처자가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