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고종 4) 김왕의 5세손 김광일(金光一)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연보(年譜)가 있고, 권말에 후손 김대진(金岱鎭)과 박주종(朴周鐘)의 발문이 있다.
목판본. 4권 2책. 규장각 도서와 장서각 도서에 있다.
권1에 시 71수, 권2에 소(疏) 2편, 권3에 서(序) 3편, 기(記) 5편, 송(頌) 1편, 잡저(雜著) 1편, 축문(祝文) 2편, 제문(祭文) 24편, 권4에 부록으로 만사(輓詞) 26편, 제문 2편, 존주록(尊周錄)·행장(行狀) 등이 실려 있다.
시는 반 이상이 만시(輓詩)이며, 그밖에 송별시(送別詩)·증시(贈詩)·화창시(和唱詩) 등이 있다.
소 가운데 「청물조병소(請勿助兵疏)」는 후금(後金)의 청병(請兵)을 물리칠 것을 과감하게 건의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자 일관된 전통인 삼강오륜과 사대(事大)의 예(禮)에 비추어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를 배반할 수는 없으며, 또한 조선의 국토와 인적 자원 및 재정적 역량을 고려할 때 후금에 충분히 대적할 수 있으므로 후금의 청병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소에는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의 대(對) 후금 정책에서 당시의 사대부들이 실리보다는 명분을 더 중히 여긴 점과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철저한 유교 의식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응지소(應旨疏)」에서는 재앙을 부르는 폐단의 주요 원인을 붕당(朋黨)과 사치, 서리(胥吏)로 규정하고, 그 시정책으로 정심(正心)·경학(經學)·입기강(立紀綱)·숭절의(崇節義)·득인(得人)·안민(安民)·납간(納諫)·수무비(修武備) 등을 제시하며 17세기 조선 사회의 각종 모순과 비리, 폐단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동시에 그 시정책까지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밖에 「평계송(平戒頌)」은 좌우명을 운문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며, 잡저인 「청물축금정산성문(請勿築金井山城文)」은 지역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축성의 불가함을 피력하는 동시에 부역 부과의 원칙을 논의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