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연구회 ()

목차
근대사
단체
1930년 10월 미국 시카고에 거류하던 진보적인 한인 학생들과 청년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사상단체.
목차
정의
1930년 10월 미국 시카고에 거류하던 진보적인 한인 학생들과 청년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사상단체.
내용

발기인대회서 나온 취지서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무산계급의 부르짖음에 보조를 같이해 약소민족의 설움을 위해 투쟁전선에 나아갈 것이다”라 했다. 이를 볼 때 이 단체는 사회주의사상을 기반으로 한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을 목표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0월 18일에 설립되었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은 강해주·김고려·김호철·김태선·이태호·이승철·변민평·한흑구 등이다. 1931년도 임원으로는 집행위원장에 임응영, 기록부원에 남궁인출, 재무위원에 변준호, 연구부장에 조중철, 선전부장에 김태선, 부원에 변민평과 김호철이었다. 그 뒤 1933년도 임원으로는 위원장에서 조중철, 기록부에 남궁탁, 재무에 변준호, 연구부에 김태선, 선전부에 이응영이 맡았다.

이 단체는 국내외 시사에 대한 정세 토론을 통해 시국 문제를 협의하고 미주 한인 사회에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1931년 3월 25일에 개최된 신간회 해소 문제에 대한 토론회에서는 신간회 해소가 시기상조임을 내세워 적극적인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동년 12월 19일에서 개최된 만주 문제에 대한 시국강연회에서는 사회주의 입장에서 바라본 현 만주사변의 의미를 발표하였다. 1933년 6월 18일에는 ‘일본제국주의 반대투쟁’이라는 제목의 시국강연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사회과학연구회는 ≪신한민보≫를 통해 <민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고찰>, <노농연방 러시아의 산업조직과 5년계획> 등의 기고문과 논설 등을 통해 미주 한인 사회에 사회주의사상 전파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의 활동은 1934년 시카고 실업가 김경에 대한 500달러 강청사건과 미주교포 지도자들을 모욕한 <URI> 팜플렛 우송사건을 계기로 미주 한인 사회내 보수세력의 강력한 비판과 탄압을 받아 위축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본회의 핵심 인물인 변준호·황유·한기도·이신명 등이 경찰에 고발되거나 국민회에 출회당하였다. 이로 인해 사회과학연구회의 활동도 1935년 10월 경부터 공개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한 채 잠복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1930년대 사회과학연구회의 활동은 이후 1940년대 초 민족혁명당 미주후원회 조직을 통한 진보적인 세력 결성과 해방 직후 미주 한인 사회내 좌익세력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계속 끼쳤다.

참고문헌

『신한민보(新韓民報)』
『재미한인오십년사(在美韓人五十年史)』(김원용, 1959)
『재미한인(在美韓人)의 독립운동(獨立運動)』(방선주,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제2차 세계대전기(世界大戰期) 재미한인사회(在美韓人社會)의 동향(動向)과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활동(活動)」(고정휴, 『국사관논총』49, 1993)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