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창의진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고종이 정환직(鄭煥直)에게 의병운동의 전개를 밀명하였다.
12월 정환직은 관직을 사양하고 허위(許蔿)의 주선으로 군자금 2만냥을 구해 중국인 왕심정(王心正)을 상해(上海)로 보내어 신식무기를 구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들 용기(鏞基)를 고향 영천으로 파견해 의병을 소모하게 하였다.
용기는 영천에서 죽마고우인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과 함께 거사계획을 확정하고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유포하는 한편,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지어 의병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또한, 영천·신녕(新寧)·흥해(興海)·청하(淸河)·기계(杞溪)·죽장(竹長)·영덕·영해 등지에 소모장을 파견, 의병규합에 힘썼다. 1906년 3월 각 고을의 포수 및 민병들로 구성된 산남의진을 구성하였다.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이종곤(李鍾崑),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봉장 서종락(徐鍾洛), 좌영장 이경구(李景久), 우영장 김태언(金泰彦) 등이다.
이들은 당시 영해 일대에서 활약하던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과 연락하면서 4월 말 청하읍을 공격할 목표로 진군하던 중 경주진위대 참령 신석호(申錫鎬)가 거짓으로 아버지 환직의 체포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용기는 중군장 이한구에게 의진을 맡기고 진위대에 출두해 붙잡혔다.
그 뒤 의진은 이한구의 지휘하에 청하·경주·청송·진보 일대를 횡행하던 중 덕성리(德星里)에서 적과 접전해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한편, 대구옥에 수감중인 주장(主將) 용기에게 화가 미칠까 우려되어 7월 하순 의진을 해산하였다. 의병장 정용기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9월에 석방되었다.
1907년 4월 중순 운주산(雲住山)에서 재기했으나, 죽장면 매현리에서 유진중 적의 기습을 받아 이틀간의 격전 끝에 의병장이 9월초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전사하자 정환직이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9월 말경 흥해·신녕·의흥에서 일본 군경과 접전해 총기 500여 자루를 노획하였다. 10월에는 흥해와 영덕을 공격해 일본 헌병을 내쫓고 분파소를 소각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겨울이 되자, 탄약과 식량이 떨어져 의병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어 일단 의진을 해산한 뒤 청하의 촌락에 은거중이던 정환직이 1907년 12월 붙잡혀 순국하였다.
그 뒤 산남의진의 유장들이 잔병을 모아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에 추대해 운문산, 청송·흥해 등 각처에서 활약하였다. 이처럼 산남의진은 경상도 지방을 총망라한 의진으로 3년간에 걸친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수행하였다.
지휘부인 유생들은 근왕적 의식을 강하게 보여 주었으며, 병사층은 다양한 계층의 민중으로 구성되어 일제의 침략과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투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