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구군창의진 ()

근대사
단체
1896년강원도 강릉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항일 의병진.
정의
1896년강원도 강릉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항일 의병진.
개설

관동창의사 민용호(閔龍鎬)가 지휘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실시되자, 각처에서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연원 및 변천

1896년 1월  제천 의진을 중심으로 구성된 유인석(柳麟錫)부대가 충북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을 당시, 여주 출신의 민용호가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원주에서 제천 의진이 모집한 군사를 이끌고 평창·진부를 거쳐 강릉으로 들어갔다.

민용호가 강릉 지방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제천 의진과 같은 연합 부대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둘째 병력과 훈련이 부족한 의병에게는 산악 지리를 이용한 전투가 보다 유리할 뿐 아니라 현지의 포수를 대거 의진에 규합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강릉에 도착한 민용호는 그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권인규(權仁奎)·이병채(李秉埰) 등의 의진 뿐만 아니라 춘천·고성·간성 등지의 의진을 합류시켰다.

또한 포수들도 규합하여 훈련시켜 1896년 1월 관동구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하고 모여드는 의병장들과 함께 부서를 정한 다음, 관동창의사란 이름으로 각 지방에 포고문을 보내 세력을 확장하였다.

관동구군창의진은 관북 방면 의진을 규합한 뒤 서울로 진격하려고 하였는데, 우선 일본의 군사·경제적 침략의 교두보인 개항장 원산을 공격하여 경내에 있는 일본 세력을 소탕하기로 하였다.

3월 초 강릉을 출발, 신평장(新坪場)에 이르러 7백여 명의 연합 의진을 재편하고 공동으로 책임 부서를 나눴다. 그 뒤 3월 하순 안변의 선평(仙坪)에 도착, 먼저 러시아 공사관과 원산항에 거류하는 외국인에게 공격 계획을 통보하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선평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눈보라가 몰아 쳐 활과 화승총을 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리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고 말았다.

그 뒤 삼척·횡성 등지에서 병력을 보충, 6월 고성·양양·설악산 등지에서 관군과 교전하였으며, 7월 황해도로 진출하여 함은준(咸殷俊)의 관군과 접전하였고, 이어 평안도 양덕·맹산으로 진군하며 관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9월 고원·영흥·정평을 거쳐 함흥에 입성, 함흥부를 점거하였으나 국내에서의 장기 항전이 불가능해지자,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의의와 평가

관동구군창의진은 원대한 계획, 광범위한 활동영역, 충실한 병력 등으로 을미의병사상 가장 뛰어난 의진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소은창의록(巢隱倡義錄)』(권종해 편)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민용호, 국사편찬위원회, 1984)
『독립운동사자료집』 1·2·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병항전(江陵義兵抗戰)에 대한 연구」(박민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91)
집필자
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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