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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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신성리마을
남한산성 신성리마을
인문지리
개념
산지에 건설된 성곽 내부에 자리한 방어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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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산지에 건설된 성곽 내부에 자리한 방어취락.
개설

조선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거나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산성이 많이 이용되었다. 산성취락은 외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지세가 험한 산에 성곽을 쌓아 만든 방어취락이므로, 발생 기원이 인위적이며 지형 요새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우리나라의 산성취락은 대체로 지형상 고위평탄면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지형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산성 내부는 대체로 평탄한 분지상으로 기복이 작고 물이 풍부하며 약간의 논밭이 있어 마을을 형성한다. 그러나 경지가 협소하므로 취락의 규모는 대체로 작은 편이다. 내부 구조물로는 전란시에 대비한 봉수와 우물이 있다. 옛날에는 산성의 군사적 기능이 발휘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흔적만 남아 있다.

내용

현재는 군대가 주둔하거나 재활인(再活人)의 개척촌이 된 곳도 있으며, 도시나 사찰·유원지·국립공원 관광지에 인접한 곳은 관광촌락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산성취락은 남한산성과 영변산성 및 금오산성 등에서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의 취락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산성리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과 경안천의 사이에 있는 해발고도 340m의 구릉성 산간분지에 있다. 이곳은 광주산맥의 말단부로서 북고남저의 지형 배치를 나타내므로, 특히 북방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알맞은 요새지로서의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서기전 5년(온조왕 14) 위례성에서 천도한 뒤 371년(근초고왕 26)까지 백제의 도읍지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은 통일신라의 문무왕 때 석축으로 축조되었으며, 1621년(광해군 13)에 증축되어 1626년(인조 4)에 준공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곽을 개축하였으며, 이때부터 남한산성은 군사적 기능만을 가진 취락으로 변모되었다.

산성에는 동·서·남·북의 4문과 16암문(暗門)이 있고, 수어장대(守禦將臺)를 비롯한 네 개의 장대가 설치되었다. 성내에는 서장대(西將臺)와 백제 시조의 사당이 있으며, 비상시에 대비한 우물(80개)과 연못(45개)이 있다. 이처럼 공고하게 축조된 남한산성도 병자호란을 맞아 청태종(淸太宗)의 20만 대군 앞에서는 무력하였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피신한 인조가 45일 만에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한 수난의 역사가 깃들인 곳이기도 하다. 1917년 광주군의 군청 소재지를 산성리에서 현재 광주시의 중심시가지인 경안(慶安)으로 이전한 뒤 호수와 인구가 격감하였다.

호수는 1871년(고종 8) 1,161호에서 1910년(융희 4) 440호, 1930년 214호로 감소하였고, 1983년 115호 529명, 1998년 현재 146호 388명이 거주하였고, 2011년에는 189호에 477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인구감소에 따른 지역쇠퇴를 방지하기 위하여 1971년에 경기도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근래 들어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영변산성은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에 있으며, 약산산성(藥山山城) 또는 철옹산성(鐵瓮山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본성(本城)·북성(北城)·신성(新城) 및 약산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 수축하였고 1416년(태종 16) 도절제사 신유정(辛有定)이 증축하였다.

성 내부는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영변면의 동부동과 서부동에 속한다. 성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한 우물이 많이 있으며, 평안도 절제사가 머무른 적도 있었다. 영변은 관서 지방 제일의 방어취락이며, 남한산성과 더불어 산성의 쌍벽을 이룬다.

금오산성은 경상북도 구미시와 김천시·칠곡군 등에 걸쳐 분포하는 금오산의 산정에 있다. 성내의 평탄면에는 네 개의 유지(溜池)와 두 개의 우물이 있으며, 소금과 탄(炭)이 발견되고 있어 한때 촌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의 상당산성(上黨山城)과 충청북도 보은군의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있는 삼년성, 부산광역시 동래구와 금정구에 있는 금정산성(金井山城) 등이 있다.

군사상 중요한 큰 고을에서는 평지의 성과 함께 산성을 별도로 두는 이중의 성곽축조 양식인 선만식산성(鮮滿式山城)을 건설하였다. 선만식산성이란 우리나라와 만주 일대에 유행하였던 이중 성곽양식이다. 팔달산을 끼고 있는 수원 화성(華城)은 평지성과 산성을 겸하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구도(靑丘圖)』
『한국지리』(권혁재, 법문사, 2005)
『남한산성』(광주시, 2002)
『한국지지』지방편 Ⅰ(국립지리원, 1984)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구읍취락에 관한 연구: 경기지방을 중심으로」(이기석, 『지리학』3, 1968)
광주시청(www.gjcity.go.kr)
『朝鮮の聚落』(朝鮮總督府,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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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오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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