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책. 목활자본. 1912년 10세손 의익(儀翼)·해익(海翼)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의익·해익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에 시 24수, 저헌집발(樗軒集跋)·종실호천군묘지(宗室湖川君墓誌) 각 1편, 현손 희조(喜朝)의 발문 2편, 권2에 논(論) 6편, 권3은 부록으로 행장·묘표·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아들 정구(廷龜)가 쓴 행장에 따르면, 그는 당대에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지은 시문이 수백 편에 이른다고 했으나, 많이 인멸된 듯 수록된 편수는 매우 적다.
논은 대개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충효의 윤리와 왕도정치를 거론한 것이다. 그러나 「수뇨유관론(溲溺儒冠論)」에서는 한고조(漢高祖)가 창업초에는 유학자보다도 무인과 전략가들을 많이 등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긍정하기도 하였다.
시는 대부분 당시의 일기 끝에 첨기되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선조를 수행하여 서관(西關)에 머무르고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우국충정을 읊은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