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명은 박준동(朴準東).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원각(圓覺). 상월은 법명. 영진(泳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삼척 김씨(三陟金氏)이다.
삼척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명산을 찾아 수도하였다. 견문을 넓히고자 중국을 여행하며 문수보살의 상주처인 오대산(五臺山)과 관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 보현보살의 상주처인 아미산(峨嵋山) 등을 순례하고 서장(西藏)의 불교 성지를 돌아본 뒤 귀국하였다.
1946년 정월 소백산의 연화지(蓮華地)에 초암(草庵)을 짓고 정진하였다. 6·25전쟁 때는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자비로써 사람들을 교화하고 악성 질병에 신음하는 난민들을 구호하여, 주민들로부터 신승(神僧)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휴전 후 다시 옛 초암으로 돌아와서 천태지관(天台止觀)을 닦다가 공삼매(空三昧)를 체득하고, 1962년 12월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 중생의 교화를 발원한 뒤 먼저 병을 고치고 액을 없애며 흉함을 피하고 길함을 취하는 방법으로 영험을 보임으로써 많은 신도들의 호응을 얻었다.
수년 동안 그를 따르는 신도가 수만 명에 이르게 되자 회삼귀일(會三歸一)·원융삼제(圓融三諦)로써 국토 통일의 이념을 삼고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법화교지(法華敎旨)로써 생활불교의 지표로 삼아, 1967년 1월 새불교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천태종을 창종하였다.
그 뒤 단일 사찰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인 천태종의 총본산 구인사(救仁寺)를 창건하였다. 종단운영·중생교화·중창불사 등으로 인한 과로로 병을 얻어서, “죽고 사는 것이 본래 공적(空寂)”이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1974년 4월 64세로 입적하였다.
불교의 전통예식인 다비(茶毘)를 행하지 않고 구인사의 주봉 석강(石岡)에 봉분하여 안장한 뒤 적멸궁(寂滅宮)이라 하였다. 대표 제자로는 남대충(南大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