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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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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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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의 정신적 · 육체적 노동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노동대상에 투입시킴으로써 유용한 재화나 용역을 만들어내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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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람이 그의 정신적 · 육체적 노동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노동대상에 투입시킴으로써 유용한 재화나 용역을 만들어내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용어.
내용

재화나 용역은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소재를 자연상태로 내버려 둔다면 일반적으로 쓸모가 없거나 적은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사람은 소재를 더욱 효용스럽도록 하기 위하여 채취·어로·사육·재배·변형·저장·이동 또는 봉사노동을 가하게 된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의 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적 요소와 물적 요소가 알맞게 결합되어 일정한 생산과정을 밟아야 한다.

따라서, 어떤 사회가 존립하는 데 필요한 소재적(素材的) 부(富)의 총량, 즉 사회적 생산량은 위의 두 가지 생산요소가 어떻게 결합되어 어떤 생산과정을 밟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에 달려 있다. 또, 사람은 그 시대에 따라서 일정한 인연과 관계를 가지고 서로 도우면서 공동으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관계가 곧 생산관계이며, 이것은 사회적 생산물의 교환·유통·분배 및 소비 등 여러 관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생산은 그 목적에 따라서 자기생산·주문생산 그리고 상품생산 등 세 가지로 구분되고, 시기별로 전산업사회(前産業社會)의 생산과 산업사회의 생산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대상을 우리 나라에 국한하여 그것을 전산업사회의 생산과 산업사회의 생산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전산업사회란 원시사회·고대사회·중세사회를 거쳐 근대산업사회가 성립되기까지의 과도기적 이행기를 포괄하며, 그 하한선은 농지개혁이 단행된 1950년대까지로 잡는다.

우리 선인들이 이 땅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생산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만∼30만년 전으로 소급할 수 있다. <전곡리유적>에 따르면, 전곡리 언저리에서 선인들은 공동체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전곡리유적>에서 “출토된 구석기의 종류와 층위학적인 위치연구는 아슐리안(Acheulian)형태의 전형적인 구석기를 출토시키는 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라 하였고, 또다른 고고학적 발굴조사보고인 <오산리유적>에 따르면, “기원전 40∼25세기에는 우리 선인들이 이미 유문토기와 무문토기를 만들어 생활자료로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선사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빗살무늬토기는 해변이나 강변의 낮은 언덕에서 주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선사시대의 공예>에서는 “그것은 이러한 토기를 만들거나 사용한 사람들이 그러한 지형을 선택하여 생활하였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우리 선인들이 어로생활을 겸하여 얼마쯤 농경단계에 돌입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4, 3세기는 한반도 각처에서 철기를 생산하여 무기나 농기구로 사용하여, 이제야 원시적 사회형태를 지나 고대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렇게 토기·철기 따위를 생산하였다는 것은 이 당시부터 그 나름대로 인적·물적 요소가 알맞게 결합되어, 일정한 생산과정을 밟아서 생산된 노동생산물이 교환, 유통, 분배되었음을 뜻한다.

비록 오늘날의 안목으로 본다면 전산업사회가 자급자족적이라 하더라도, 토기나 철기 등 생활필수품은 높은 수준으로 숙련된 소수의 기술자만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어서, 어떤 형태로든지 교환, 유통되어 널리 사용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산업사회의 생산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적 요소의 기초인 토지소유의 형태와 인적 요소인 일반백성의 존재양상 및 이와 관련되는 여러 관계가 명백해져야 하므로 몇 갈래로 나누어 살핀다.

(1) 토지소유형태

우리 나라와 중국 등 동양 제국의 역사적 배경하에서는 대략 비슷한 유형의 토지소유관계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존속하였다. 그것을 ‘토지소유의 아시아적 형태’라고도 하고 있다.

즉, 최고정점에 용립(聳立)한 전제군주는 “넓은 들과 산 등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토지는 임금의 것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는 왕토사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각 왕조의 초기는 실질적으로 토지는 왕유(王有)였지만, 중기·말기에 이를수록 그것은 명목에 불과하고 사실상 사유화(私有化)하는 모순이 반복되었다.

(2) 일반백성의 성격

농업·수공업·상업 그밖의 용역에 종사한 일반백성은 한결같이 국왕의 신하였다. 이러한 관념으로 직접생산자인 일반백성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3) 수납체계

일반백성은 서유럽 중세사회의 농노(農奴)처럼 존재하였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중층적으로 군림한 상전에 대해서 충성을 맹세하고 지대(地代)로서 일정량 이상의 지조(地租)와 공물(貢物) 및 요역(徭役) 등 현물·노동지대를 지나치도록 과중하게 부담하여 생산의욕이 크게 떨어졌다.

이러한 수납체계는 각 왕조 초기보다 후기에 이를수록 문란해지고 가혹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으며, 그러한 모순은 완만한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이룩하면서 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 등 각 왕조로 교체되기 직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현물·노동지대는 17세기에 대동법이 실시되어 쌀·피륙·돈 등 실물화폐 지대로 변혁됨에 따라서 획기적으로 지양되었다.

(4) 근대적 요소의 싹틈

일반백성들은 저마다의 재질과 환경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생산업에 전념하려고 하는 의욕이 생겼다. 농업 부문에서는 벼의 직파법(直播法)이 모내기법으로 바뀌어 노동생산성이 4배로 증대되고, 벼·보리 이모작법이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는 벼·목화·인삼·과일 등 전업적(專業的)인 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는 초기농업자본가가 등장하였고, 도자기·종이·직물·죽세공 등 가공업을 전업으로 하는 수공업자, 그리고 상업을 전업으로 하는 보부상과 그 상인조직인 상단(商團)도 성립되었다.

18세기 후기는 보부상 단원의 무대인 향시(鄕市)수는 1,000개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 말기의 제모순이 세도정치의 형태로 강하게 대두된 데다가 열강의 침입을 받고 자생적으로 싹처럼 자라고 있었던 근대적인 요소는 말살되기 시작하였다.

(5) 일제강점기의 생산

조선의 식민지화과정은 4단계로 구분된다. 첫째는 1875년의 강화도사건이고, 둘째는 1895년의 김홍집친일내각(金弘集親日內閣)의 성립이며, 셋째는 1905년의 통감부 설치, 넷째는 1910년의 조선총독부 설치이다. 일본식민주의의 야망은 이렇게 구현되어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먼저 우리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15년부터 이른바 산미증산계획 등을 수립하여 이 땅을 재배식민지(栽培植民地)로 고정시켜 저들의 식량·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전락시키는 한편,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고 일반백성을 노동의 도구로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심지어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일으킨 전쟁터로 몰아넣어 총알받이로 만들었다.

이처럼 가혹한 식민정책에도 선인들은 국권을 회복하려는 일념으로 각처에서 끈질긴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이래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족자본과 노동은 온갖 노예적 수모와 박해를 받으면서 꾸준히 항쟁을 전개하여 1945년 마침내 일제가 물러갔다.

하지만, 식민지하에서 그처럼 생산요소가 왜곡되게 흐트러져서 난맥을 이루어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산업사회에 있어서의 생산은 기업이 담당한다. 기업가인 자본가는 자본을 투입하여 생산수단 및 노동 등의 요소를 구입, 일정한 생산과정을 거쳐 상품을 생산, 판매하고, 주어지는 이윤을 취득한다.

조선 말기도 이러한 기업이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일제하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우리 국민이 주체가 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것은 광복 이후의 일이다.

(1)광복 직후의 요소분포

광복 직후의 생산 일반은 문자 그대로 난맥이었다. 국토의 양단으로, 1943년에 대비하여 1946년에는 경지면적은 52.7%로 감소했음에도 인구와 농가호수는 각각 72.7%와 70.2%로서 절대적으로 증가하였다.

전력생산은 0.9%, 석탄생산량은 4.6%로 각각 감소하였고, 철강생산량은 0으로 전락하였다. 재정규모와 통화량지수는 770.3과 1,086.3으로 팽창하였다.

이에 따라 도매물가지수는 1086.3, 쌀값지수는 1만 5121.6으로 폭등하였지만, 노임지수는 물가상승률에 대비하여 3분의 1 내지 5분의 1인 3517.4에 불과하다.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하여 국민적 생산은 미궁으로 치닫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6·25전쟁이 일어나 생산을 논할 수가 없었다.

(2) 경제개발5개년계획

농지개혁이 실시된 결과 광범한 농촌지역에서도 의무교육 외 중등·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광복 이래 15년 사이 많은 인력이 높은 수준으로 양성되어 1960년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실천할만한 힘을 갖추었다.

계획이나 실천에 있어서 얼마간의 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긍지를 가질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현상을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하고 ‘배달민족의 기적’이라고도 한다.

저마다 타고난 자질을 갈고 닦아 이룩한 기량을 더욱 슬기롭고 힘차게 발휘할 수 있도록 진정한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물질적 생산이 선진국을 따라잡고 나아가서 앞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선진국을 앞지르려는 목적은 결국 개개국민의 극대만족을 누리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되는 재화와 용역의 효용가치가 극대화되도록 자원이 배분되고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 경제, 산업

참고문헌

『전곡리유적』(문화재관리국, 1983)
『오산리유적』(서울대학교 박물관, 1983)
『선사시대의 공예』(강이구, 예술원, 1984)
『한국경제연감』(조선은행, 1949)
『주요 경제지표』(경제기획원, 1987)
『산업생산연보』(경제기획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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