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기호 Fe. 지구 속의 다른 광물질과 섞여 대량으로 존재한다. 지구표면에는 평균 5.63%(중량)의 쇠가 포함되어 있는데, 쇠는 인간이 문명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유용한 금속 중의 하나이다.
융점(融點) 1,535℃, 비점(沸點) 2,750℃, 비중 7.86, 경도 4.5도로, 쇠가 지닌 단단하고 유연한 성질을 이용하여 일상생활에 매우 유용한 시설장비 · 도구 · 기계 따위를 만들어 쓰고 있다.
보통 쇠 속에는 탄소 · 규소 · 망간 · 유황 · 인 등이 조금씩 섞여 있는데, 전통사회에 있어서는 이러한 원소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는 것을 잡철, 그 순도가 높은 것을 무쇠[水鐵], 더욱 순수한 것을 참쇠[正鐵]로 구분하였다.
잡철은 순도를 높이지 않고서는 쓸모가 없었고, 무쇠를 녹여서 부질[鑄物]하여 솥이나 화로 등을 만들었으며, 참쇠는 달구어서 방짜[鍛冶]하여 칼 · 창 · 도끼의 이기(利器)를 만들었다.
인류가 쇠를 활용한 역사는 매우 장구하다. 기원전 4000년대에 이루어진 이집트의 고분이라든지, 기원전 3000년대에 건축된 기제(Gizeh)의 피라미드 속에서 철제품이 출토되었다. 분석한 결과 그것은 별똥과 함께 천체에서 땅 위에 떨어진 운철(隕鐵)로 확인되었다.
사람의 지혜로 쇠를 처음으로 녹여낸 것은 기원전 2050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Ur) 성탑(聖塔), 지구라트(Ziggurat) 곁에 벽돌로 쌓은 쇠를 녹인 가마[爐]자리와 쇠찌꺼기가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사실이 고증된 것이다.
그 뒤 쇠를 녹이고 달구는 기술은 히타이트(Hittite) 왕국에 의해서 독점되어 있다가 기원전 1200년 경에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고대동방제국, 다른 하나는 유럽의 각 지역으로 전파되어 서서히 철기시대로 옮겨졌다.
인도나 중국에 쇠를 생산하는 기술이 들어온 경위는 고대동방제국으로부터 연유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인도에서는 기원전 1000년 경부터 쇠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1100년 경 은(殷)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었지만, 널리 쇠를 사용하게 된 것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의 일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고대동방제국과 유럽의 각지에서 방짜쇠[鍛冶鐵]를 생산한 데 비하여 부질법으로 쇠를 이용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쇠를 주조하는 기법은 중국이 다른 지역보다 1600년쯤 앞섰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로부터 그 기술을 전수받은 일본에서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 기원전 300∼200)의 가라코이(唐古)와 우리와리(瓜破)유적에서 쇠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쇠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00∼400년 경이다. 평안북도 독로강(禿魯江) 유역에 자리잡은 노남리유적 제2문화층에서 쇠도끼 · 꺾쇠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도끼 중 하나는 주조물이고 다른 하나는 단조물(鍛造物)이다.
그 제작기술이라든지 종류 · 형태가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의 그것과 흡사하면서도 공통점이 많아 그의 사용시기는 기원전 5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한편 반도의 남부지역에 있어서도 뒤이어 곧 철기를 사용하였음이 확실하다.
광복 이래 고분발굴에서 많은 쇠붙이가 출토되었으며,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진조의 다음과 같은 기록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국내에 쇠가 생산된다. 한(韓) · 예(濊) · 왜(倭)가 모두 이것을 취하고, 저자에서는 모두 쇠를 가지고 매매하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화폐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구절이다.
쇠는 문명의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인류가 처음으로 쇠를 발명하여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고 날[刃]을 다루어서 끝을 뾰족하게 하는 방법을 깨닫게 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문명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쇠를 가지고 칼 · 망치 · 도끼 · 정 · 끌 · 괭이 등을 만들어 사용하게 됨에 따라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에 커다란 변혁이 있었다. 즉, 쇠는 인류가 영위하고 있던 300만∼500만년 동안의 오랜 원시공동체생활을 청산하게 하고,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면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문명생활을 하게 한 지렛대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보기는 기원전 4000년 이래의 이집트문명 · 고대동방제국 · 메소포타미아 · 인도 · 중국 · 한국 ·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① 경제 · 사회적 변혁:쇠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서 물자를 생산하는 일, 재산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여러 관계에 있어서의 커다란 변혁을 들 수 있다.
쇠로 만든 도구나 이기를 사용하는 개인 또는 집단의 생산력은 그것을 갖지 못했을 경우보다 획기적으로 높아졌으므로, 그 현상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쇠를 가진 소수는 지배씨족으로 등장하면서 토지나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구시대의 공동체성원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로 많은 피지배인들은 마치 지배자의 토지나 마소처럼 하나의 소유물인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원시사회가 몰락하면서 새로이 성립된 고대사회를 역사학에서 노예제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렇게 전락한 고대사회의 피지배계급인 노예를 기준으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② 문화적 변혁:철기생산력의 혁명적 변혁에 수반된 정치 · 종교 · 문화 전반의 획기적인 진보를 가져왔다. 경제 · 사회적 변혁은 필연적으로 문화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며 그것이 곧 고대동방제국이나, 동양제국(인도 · 중국 · 한국 · 일본)에서 발달되어 온 제 문화이다.
지구상에서 일찍이 쇠를 사용하지 못한 지역, 이를테면 남북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몇몇 대륙은 16세기 이래 서유럽 사람들이 침입하기 이전에는 아직 원시 사회상태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 백제 · 신라 등 삼국이 건국된 것은 한반도의 철기생산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륙 쪽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 온 사람 중 고구려의 주몽(朱蒙), 백제의 온조(溫祚),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 석탈해(昔脫解) · 김알지(金閼知) 등은 한결같이 이 땅에서 먼저 철기를 소유하고 통괄한 지배씨족이었다.
① 고구려:고구려의 지배씨족은 원래 동북중국에 살던 부여족의 한 계파로 당초 쑹화강 유역에서 살다가 기원전 4세기 경부터 야철(冶鐵) 기술을 지니고 남하하여 처음에는 동가강(佟佳江) 유역에서 압록강에 걸친 산악 · 협곡지대에 정착하면서 수렵과 농경생활을 하였다.
배달민족의 의식을 깨달은 이들은 철기생산력을 바탕으로 하여 밖으로는 꾸준히 대륙세력에 대항하면서 안으로는 기존의 여러 씨족과 부족을 통합하여 기원전 37년에는 고주몽을 우두머리로 하여 고구려왕국을 세웠다.
② 백제:고구려의 고주몽과 졸본부여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온조도 철기 지배씨족의 직계후손이다. 온조는 그의 형인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기원전 18년에 오늘의 서울 부근에 있는 위례(慰禮)에 정착하였다가 다시 남하하여 백제(伯濟:지금의 廣州)로 옮겨 국호를 백제라 하고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었다.
결국 온조는 부여족의 한 계파로서 철기생산기술을 지니고 남하하여 마한의 소국인 백제국을 본거지로 하여 한반도의 서남쪽을 통합한 고대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③ 신라:신라는 변한의 소국인 사로국(沙盧國)을 본거지로 하여 기원전 57년에 건국된 고대국가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술된 박 · 석 · 김 시조들의 난생설(卵生說)은 어느 경우나 쇠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건국신화라기보다 그들이 사로국에 있어서 쇠의 생산과 수요를 총괄한 삼대지배씨족의 우두머리였음을 입증하는 기록물로 풀이된다. 그들은 서로 혼인을 통하여 혈연적으로 굳건한 유대관계를 맺은 철기지배씨족이었다.
금(쇠=금=金)궤짝에서 태어난 김알지라든지, 야장(冶匠)의 후예로 자처하는 <석탈해 설화>는 모두 그들이 철기지배씨족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변진국출철(弁辰國出鐵) 기록은 이 사로국(斯盧國)과 이웃한 달내쇠곳[達川鐵山]임이 거의 확실하며, 사노→신라는 ‘쇠나라’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광복 전후에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많은 쇠붙이는 삼국시대의 철기문명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출토품을 원용하여 쇠의 생산방법, 생산력 그리고 당대의 사회 · 경제 · 문화적 상황 일반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서술상의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1921년에 보고된 금관총, 1972년의 무녕왕릉, 1973년의 천마총에서 출토된 쇠붙이만을 주로 논술의 대상으로 국한한다.
크고 작은 칼 · 창 · 삼지창 · 화살촉 · 도끼 · 낫 · 끌 · 집게 · 가위 · 못 · 꺾쇠 등 쇠로 만든 생활 · 생산도구 및 무기류가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졌는지 아직 구체적으로 분석된 자료가 없으므로 간접자료를 원용한다.
서울 구의동 고분에서 출토된 도끼의 시료를 분석한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도끼에는 순철(Fe) 외에 0.86%의 탄소, 0.42%의 규소, 0.04%의 인, 0.05%의 유황이 각각 함유되어 있고, 화살촉은 보다 순도가 높아 각각 0.51%, 0.39%, 0.03%, 0.026%, 0.006%의 불순물이 들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의 이기류(利器類)는 방짜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각지의 고분에서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쇠로 만든 그릇과 말을 부리는 데 사용된 여러 가지 쇠붙이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금관총과 천마총에서는 큰 쇠솥이 각각 4개씩 출토되었고, 마구로서 말신[鐙子], 재갈, 사슬, 안장과 부속품, 방울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부식되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쇠붙이들이 숱하게 출토되었으나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 분석, 조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간접자료로 미루어 볼 때 솥이나 말방울 따위는 무쇠부질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무쇠부질법이 발달하여 있었고 삼국시대 이래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불상 · 솥 · 화로 등이 한결같이 무쇠부질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판장쇠는 전통사회에 있어서의 쇳덩어리를 일컫는다. 판장쇠의 무게는 70∼80근 (42∼48㎏)이다. 모든 발굴보고서에서는 철정(鐵錠) · 방주철봉(方柱鐵棒) 또는 장방형철판 등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그 “용도는 불행하게도 잘 모르겠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전통시대 경주지방의 쇠점[鐵店]에서는 판장쇠를 ‘무대가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쇠점에서 녹여서 굳힌 원자재 쇳덩어리를 가리킨다. 천마총 출토의 판장쇠를 분석, 보고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질이 균일하지 않았는지 차이가 있다. 그것은 0.4%의 탄소강을 1,100℃에서 녹여 공기 중에서 냉각시킨 것과 같은 조직이지만, 탄소 함량에는 차이가 있다. ……철정의 제조방법은 주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판장쇠는 쇠둑부리[鎔鑛爐]작업에서 쇳물을 녹여 굳힌 쇳덩어리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판장쇠가 금관총에서는 1,183㎏, 천마총에서는 422㎏이나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에 있어서 판장쇠가 가진 두 가지 구실 중 하나는 판장쇠의 본원적 구실이고, 다른 하나는 부장품적 구실이다. 본원적 구실은 귀금속으로서, 소유한 개인이나 국가의 재부적(財富的) 표상으로서 축적, 보장하는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무쇠부질나 방짜라는 기본적 원자재로 사용되었고, 때로는 화폐 구실을 하면서 다른 재화의 가치척도 · 교환의 매체적 기능도 가졌던 것이다. 판장쇠의 본원적 기능이 이와 같으므로 지배씨족의 유일한 우두머리는 필연적으로 이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서 예장될 때에, 생전에 애용하던 금 · 은 · 보화와 함께 소중하게 보관하던 판장쇠의 일부가 부장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부장량은 예장자의 신분 및 소유의 정도에 상응하게 하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무녕왕릉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쇠붙이의 수량적 비교를 보면, 양고분 발굴보고서에 수록된 출토 쇠붙이는 무녕왕릉에서는 쇠붙이로서 겨우 철모(鐵모) 1개가 부장되어 있는 데 대하여, 천마총에서는 대형의 솥 4개, 판장쇠 422㎏, 기타 숱한 철제 이기와 용기 · 마구 따위가 출토되었다. 이들 두 고분은 5세기 전후 거의 동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당시 부장제도상의 차이 등 다른 조건을 제외하고 쇠붙이만을 기준으로 하여 고찰할 때, 이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즉 삼국통일이라고 하는 앞날을 전망한다면 철기생산력이 일국의 사회 · 경제 · 문화 · 국방상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삼국시대부터 14세기 후기까지 석철 · 사철 등의 원철광을 전업적으로 쇠둑부리하여 판장쇠 등 여러 가지 쇠붙이를 생산하던 일정한 지역인 철소(鐵所)에는 자기소(磁器所) · 금소(金所) · 은소(銀所)와 마찬가지로 소를 통괄하는 우두머리인 소리(所吏)와 높은 수준의 기능보유자로서 직접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소민(所民)이 있었다.
철소는 쇠생산이 전문화되어 있는 생산공동체로서 그곳에서 생산된 양질의 생산물을 세공으로 관부에 수납할 책무를 가지고 있으며, 수납하고 남은 열등품은 일반 백성들의 수요품으로서 서로 물물교환하여 소민의 생활을 유지하였다.
14세기 이전에는 이러한 철소에서 쇠둑부리작업을 통하여 무쇠부질 또는 방짜하여 여러 가지 쇠붙이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나치게 사대부층을 우대하면서 생산업으로 농업만을 본업으로 삼는 정책을 쓰고 상 · 공업을 말업으로 천시하였다. 양반 · 관리층은 상공업자를 상공천례(商工賤隷)로 학대하면서도 수탈은 더욱 강화하였으므로 철소는 조선 초기에 갑자기 소멸되었다.
이에 철소는 철장(鐵場)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전기에는 충주목부 남 말흘리(末訖里), 전의현(全義縣) 동 서방동(西方洞), 울산군 북 달천리, 야로현(冶爐縣) 동 심묘리(心妙里), 무주군 동 봉촌 등 전국에 20개의 철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철세공(正鐵歲貢)은 조선 전기 철장에서 생산한 일정량의 판장쇠를 연공(年貢)으로서 관부에 수납하는 일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는 각 지방에 산재한 철장에서 일정량의 판장쇠를 중앙정부에 수납하였다. 그런데 세지에는 전라 · 경상 양도의 철장 세공량만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단편적인 것이어서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철장이 경상도에 치우쳐 있고 세공량도 전라 · 경상 양도 중 경상도 것이 91.3%를 차지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삼한시대 이래 달내쇠곳을 중심으로 쇠를 다루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과 풍부한 자원이 상대적으로 비교우위의 조건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임진 · 정유 양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사이에 국토가 폐허화되었고 철장도 폐쇄되는 국면에 이르렀다. 그러나 난후의 부흥기에는 농공기구 · 생활도구 등 쇠붙이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한편 대동법을 실시하여 농 · 공 · 상업 등 산업전반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쇠붙이의 수요도 가속적으로 증대하였으나,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공급이 거의 없었으므로 고철이나 판장쇠 값이 거듭 폭등하였다. 당시 쇠붙이의 거래를 독점하고 있던 시전(市廛:六矣廛)의 잡철상인과 수철계공인(水鐵契貢人)인 야장 사이에 고철과 판장쇠 거래독점권을 둘러싸고 극심한 경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송사로까지 발전하여 장기화되었다.
이러한 쇠의 공급부족 현상은 이미 폐쇄되어 있는 구시대의 철장을 재개발해야 하는 필연적인 현실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야장도 이미 흩어져버렸으므로 정부에서도 대책을 세울 만한 겨를이 없었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하에서 새로운 형태로 변질되어 부흥한 달내쇠곳과 그 주변에서 보기를 찾아본다. 17세기 중기 쇠생산에 유서가 깊은 달내쇠곳을 부흥, 개발한 우리 나라 최초의 초기자본가적 선구자인 이의립(李義立)은 전후 15년 동안 철산을 찾아 전국을 편력하였다.
1657년(효종 8) 달내쇠곳에서 쇠 녹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다음해 정월에는 이곳에서 제작한 궁각(弓角) 280통, 함석 100근, 선철(銑鐵)1,000근, 무명 100필, 주철환(鑄鐵丸) 73만 개, 쇠솥 440좌를 훈국(訓局)에 자진하여 헌납하였다.
이에 효종이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철산개발에 더욱 몰두하였다. 1673년(현종 14)에는 숙천도호부사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목민(牧民)의 도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국왕은 이의립 삼대(본인과 아버지 · 아들)에게 가선대부의 위계와 함께 달내쇠곳을 하사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달내쇠곳에서 채광한 사철 · 석철로 쇠붙이와 무쇠부질을 사기업적으로 경영하였으며, 그 업은 직계 · 방계 후손들에게 승계되었다. 즉, 237년 동안 13대손이 이은건(李殷健)에 이르기까지 이 업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1908년 통감부에서 공포한 한국광산법에 의하여 철장은 일본인 나카무라(中村俊松)에게 약탈당하였다.
14세기 이래의 쇠생산 방법은 원리적으로 오늘날과 비슷하다. 조선 후기에는 이의립과 그 후손들이 경영한 사영철수공업도 원칙적인 과정은 동일하였다.
달내쇠곳과 그 주변에서 수집한 문헌기록자료 · 회상자료, 그 밖의 유물 · 유적을 조사, 분석 정리한 결과를 바탕으로 쇠를 생산하는 과정을 몇 가지로 구분하면, 땅에서 사철이나 석철을 파내는 채광업, 원광을 녹여 쇳물을 뽑아내는 쇠둑부리, 무쇠를 녹여 그릇을 만드는 무쇠부질, 판장쇠나 고철을 달구어 방짜하는 단야업으로 나누어진다.
전통사회에서 쇠의 원광을 채취하는 채광(採鑛)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사철 · 토철 · 석철 등을 철산에서 그대로 채취하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냇가나 개울가의 모래 속에 들어 있는 사철을 물에 일어서 채취하는 방법이다.
① 석철:쇠 성분이 많이 함유된 철광석으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보은현 남 노성산(老聖山), 밀양도호부 동 송곡산(松谷山), 황해도 백천현 서 구시산(仇時山)과 현묵 금산리, 강원도 양양군 서 철굴산(鐵堀山), 평안도 개천군 서 건지산(巾之山) 등 전국 14개 지역에서 석철이 생산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의 지역에서도 석철을 채취한 곳은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합천군 야로면 가야산록의 쇠둑부리터에서 반쯤 녹다 엉겨붙은 석철을 발견하였고 달내쇠곳에서도 석철이 나고 있기 때문이다.
② 사철:쇠의 성분이 일정량 이상 섞여 있는 모래 또는 흙을 채취하는 방법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달내쇠곳에서와 같이 철산에서 광석으로 채취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철분이 비교적 많이 섞여 있는 냇가 모래를 흐르는 물 속에서 흘리면서 선광(광석의 등분을 가림)하여, 다시 큰 바가지에 담아 물 속에서 선광하는 방법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연천군 북 금동산(金洞山), 충청도 석성현 남 삼산리(三山里), 경주부 동 팔조포(八助浦), 함경도 길수북부 서 다신항(多信項) 등 전국 24개 소에서 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수철이 난다고 기록한 곳이 13개 소, 그냥 철이 난다고만 되어 있는 곳이 82개 소로서 15세기 초기에 이루어진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 113개 처에서 쇠가 생산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사철이나 석철 등 광석을 쇠둑부리가마 안에서 녹여 쇠둑부리의 원자재인 판장쇠를 지어내는 과정으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쇠둑부리 방법은 풀무의 좌변에 9개의 구멍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야로법(冶爐法)이다.
쇠둑부리가마를 만들 때에 먼저 네 모퉁이(四郭)를 쌓아 올리고, 곽 안에 9개의 골[行]을 지어 골마다 바람이 잘 통하게 하여 쇠를 녹여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쇠둑부리는 강한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장치와 높은 열을 관리하는 일정수의 대장장이, 여러 가지 시설장비가 알맞게 갖추어진 뒤에 기술적으로 분화된 몇 개의 생산과정을 겪음으로써 비로소 의도한 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① 대장장이[冶匠]:쇠둑부릿일을 도맡아 하는 높은 수준의 기술을 지닌 편수인데, 쇠둑부릿일을 하는 데는 고도로 숙련된 대장장이인 골편수와 불편수 각 1명과 그들을 보좌하는 숙련공인 둑수리와 뒤불편수가 각 1명씩 참가하여야 된다. 그 밖에 잡역인 풀무꾼 · 숯장이 · 쇠장이 그리고 경영주인 전주 등 도합 44명의 인력이 필요하다.
골편수는 둑수리를 데리고 9개의 골구멍을 끝손질하는 외에 전작업을 총괄지휘하는 공장장 격이다. 10년 이상의 풍부한 경험과 수련을 쌓음으로써 그 기능을 터득할 수 있다. 불편수는 뒤불편수를 데리고 토둑(가마바탕)을 쌓는 외에 숯대장 · 쇠대장과 풀무대장을 지휘한다.
숯대장은 7명의 숯장이를 지휘하여 가마 안에 알맞은 숯을 날라 넣고, 쇠대장은 7명의 쇠장이를 지휘하고, 풀무대장은 선거리 · 후거리 각 8명의 풀무꾼을 지휘 교대시키면서 풀무의 작동을 알맞게 조정한다.
전주는 원자재와 운영자금을 조달하고, 2명의 공양주는 이들 대장장이들의 음식물을 준비한다. 골편수의 지휘하에 전원 44명의 손발이 제대로 맞아야 쇠둑부릿일에 성공할 수 있다.
② 쇠둑부리터:철광을 녹여 판장쇠를 지어내는 터전 또는 쇠점이라고도 한다. 터는 보통 남쪽으로 향한 아늑한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그 보기로서 월성군 외동면 모화리의 속칭 ‘아랫장터’에서 찾아 작업환경가상도를 그려본 것이다[그림 1].
여기에서 터의 동서는 약 45m, 남북은 40m이며 터의 면적은1,800㎡이다. 그 전후면을 돌로 쌓아 올린 토둑 안에 가마가 박혀 있다. 터의 서쪽에는 숯장이대기소, 북쪽에 저탄장, 남쪽에는 취사장이 배치되어 있다.
터 북편에는 사철저장소, 남쪽에는 쇠장이대기소, 북쪽에는 풀무꾼대기소가 있다. 골편수와 불편수 등 각급 기능적 지휘자들은 각각 작업을 지휘하기에 알맞은 위치로 이동하고 16명의 풀무꾼은 선거리 · 후거리 각 8명씩 교대로 풀무를 밟는다.
③ 가마의 장치:쇠둑부리가마와 그 주변의 장치는 터 중심부에 가마가 놓인 토둑이 있다. 돌로 앞뒤를 쌓아올린 토둑의 길이는 20.0m, 너비는 2.0m, 중심부의 높이는 2.3m인데, 양측이 비스듬히 낮아져서 지면에 닿는다. 가마는 타원추형인데, 그 윗부분의 가로는 1.3m, 세로는 2.3m이다[그림 2].
가마 안쪽에는 내화도가 높은 점토를 두께 10m쯤으로 쌓아올렸다. 가마 뒤쪽에는 풀무바람을 받아들이도록 바람구멍이 있고, 앞쪽에는 쇳물을 뽑아내는 초롱구멍과 불씨를 붙이는 불쏘시개 구멍이 있다. 가마 뒤쪽에는 흙벽돌과 판자로 장치한 길이 4.0m, 너비 50㎝의 풀무가 장치되어 있다.
④ 쇠둑부리 작업과정:쇠둑부릿일의 우두머리인 골편수가 가마 끝손질을 마치면 불편수는 가마 밑바닥에 불쏘시개를 깔고 숯대장에게 지시하여 가마 안에 참숯을 채우게 한다. 숯이 가득 찼을 때, 공양주가 정성들여 차린 고사상을 가마 앞에 옮겨 놓고 고사를 지낸다.
이 일은 보통 골편수가 맡으며, 음복이 끝나기가 바쁘게 뒤불편수는 미리 준비한 불씨를 불쏘시개에 붙인다. 불이 붙어 흰 연기가 숯 사이로 오르기 시작할 때, 불편수는 “불매(풀무) 올려라!”라고 외친다. 이때 선거리 8명의 풀무꾼은 서서히 풀무를 밟기 시작한다.
이윽고 가마 안에 숯불이 돌기 시작하면 풀무꾼의 동작은 더욱 빨라진다. 이즈음에 불편수가 쇠대장에게 “쇠넣어라!”라고 지시하면, 쇠장이는 2명씩 짝지어 앞창을 단 바소쿠리로 사철을 담아다 가마에 넣는다. 가마 속의 숯과 쇠가 이글거리기 시작하면, 풀무꾼 · 숯장이 · 쇠장이 등은 동작이 더욱 빨라진다.
가마의 불꽃이 하늘을 찌르면 일동은 신나게 <풀무노래>를 다음과 같이 부른다. “불매 불매 불매야 부륵 딱딱 불매야 이 불매가 뉘 불매고 경상도 높부에다 숯은 어데 숯이냐 치술령 참술이라 쇠는 어데 쇠이냐 달내쇠곳 판장쇠……”
⑤ 무대가리:쇳물을 초롱구멍으로 뽑아내어 바탕에서 굳힌 쇳덩어리인 판장쇠의 사투리로서 이는 쇳물덩어리에서 유래된 말인 듯하다. 풀무질을 시작한 뒤 6∼7시간 동안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때, 골편수는 쇠망치를 가지고 가마의 외벽을 가볍게 치면서 쇳물이 괸 정도를 확인한다.
알맞다고 판단되면 둑수리에게 지시하여 쇠창으로 초롱구멍을 뚫게 한다. 뚫는 순간 금빛 쇳물은 골을 따라 힘차게 흘러나와서 미리 장치해 놓은 판장쇠 바탕에 차례로 괴어서 굳는다. 이것이 무대가리(판장쇠)이다. 이것을 조정하는 일은 뒤불편수가 맡는다.
작업이 순조로울 경우 7, 8개의 판장쇠를 얻으며, 쇳물이 멎으면 둑수리는 점흙으로 초롱구멍을 막는다. 부릿일을 그대로 계속하면서 4∼5시간 간격으로 쇳물을 뽑아내는 일을 반복한다. 뒤불편수는 판장쇠가 식기를 기다렸다가 끝손질하여 창호지로 깨끗이 포장하여 곳간에 보관한다.
고철이나 판장쇠를 무쇠가마에서 녹여 여러 가지 쇠붙이를 지어내는 작업과정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무쇠부질법이 발달하였으나,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말음(末音)에서는 18세기 중기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양 홍씨 일족이 이 업을 대규모로 경영하였다. 이곳을 보기로 하여 무쇠부질 방법을 간추린다. 18세기 전기에 홍시원(洪時源)은 연료자원이 풍부한 운문산 기슭, 솥계 골짜기에 있는 말음으로 이사와서 무쇠부질업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1920년대까지 약 200년 동안 솥계 솥은 영남일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홍성기(洪性基)와 문성(文性) · 호성(浩性)은 홍시원의 7세손으로서 말음의 마지막 주물공장 경영자였다. 무쇠부질일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설장비 · 원자재 · 인력이 동원되어 일정한 작업과정을 겪어야 한다.
① 바숨내기:무쇠부질하여 어떤 용기나 연모를 짓기 위한 거푸집[鑄型]을 이곳에서는 ‘바숨’이라고 하며 이 작업을 전문적으로 맡는 우두머리의 숙련기술자를 도래질편수라고 한다. 먼저 찰흙을 가지고 대략 그 형태를 만드는데, 이를 피바숨[粗鑄型]이라 하며, 다시 섬세하게 끝손질하여 완성시킨 것을 장두바숨이라고 한다.
이러한 바숨내기일은 무쇠부질일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소요된다. 먼저 찰흙4(부피), 익힌 되바숨 가루와 4∼5㎝의 길이로 자른 짚 1:2의 비율로 섞어서 곱게 이긴다. 이 일을 질흙건즈리기라고 한다. 2명이 하루 동안에 솥 50째기 기준 1단위 작업용의 점흙을 이긴다.
② 피바숨:곱게 흙건즈리기한 점흙으로 지은 무쇠부질의 본으로, 피바숨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능자인 2명의 손지꾼과 1명의 잡역꾼인 허드레꾼이 날라오는 점흙으로 피바숨을 만드는 광틀(물레)에 얹어 놓고, 광틀을 돌리면서 쇠꼬챙이로 만든 도래를 이용하여 피바숨을 짓는다.
바숨은 암수 한쌍으로 이루어진다. 안쪽의 암컷을 고딩이, 밖의 수컷을 거름이라 부른다. 솥바숨을 보기로 들면, 거름에는 솥발을 낼 수 있도록 3개의 기둥을 달고 기둥에는 각각 솥발 모양의 장방형 구멍을 뚫어서 나중에 이 구멍으로 쇳물을 부어 넣는다.
③ 도래질편수:피바숨을 섬세하게 끝손질하는 우두머리 기능자로서 명인의 소질이 있는 사람이 10년 이상 손지꾼 노름을 하면서 수련을 쌓아야만 된다고 한다. 도래질편수는 작업장 광틀 옆에 수비(水飛:곡식 가루나 그릇만들 흙 따위를 물에 넣고 휘저어 잡물을 없앰.)한 황토색 점액인 질물 5와 초목회를 수비하여 만든 잿물을 5의 비율로 섞어서 만든 유약인 깔매를 준비한다.
조수격인 수중꾼이 피바숨 한 짝씩을 장작불에 따끈하게 만들어서 광틀에다 고정시키면, 도래질편수는 광틀을 서서히 돌리면서 먼저 질물을 되바숨 안쪽에 발라 표면을 매끄럽게 한 후 깔매를 귀얄에 묻혀 골고루 칠하고 도래로 문지른다. 기우뚱거리면서 재빨리 돌아가는 되바숨 표면은 어느덧 마치 유리알처럼 매끈해진다.
④ 장두바숨:고딩이와 거름의 전을 서로 맞추어 완성시킨 무쇠부질의 본으로 이 일은 봉쇠꾼이 맡는다. ‘봉쇠’란 고딩이와 거름 사이에 끼우는 무쇠조각이다. 3, 4개의 봉쇠를 끼워서 암수가 알맞은 간격을 유지하도록 잘 맞추어 고정시킨다.
봉쇠꾼이 암수의 전을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맞추면, 지어낸 연모는 한쪽에 쇳물이 치우쳐 들어가서 쓸모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장두바숨을 완성시키는 봉쇠꾼의 기능도 일정한 숙달을 요하는 것이다.
⑤ 불편수:장두바숨을 기왓골 모양의 굴 안에 넣어 장작불로 구워내는 우두머리편수로서 이 굴을 적집이라고 한다. 적집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5∼6시간 장작불을 피우면 장두바숨이 익기 시작한다. 불편수는 적집 안에서 달아오르는 장두바숨의 빛깔을 살창구멍을 통하여 관찰하고 그것이 익는 정도를 식별하여야 한다.
덜 익으면 쇳물이 들어가다 멎어버리고, 너무 익으면 장두바숨이 서로 엉겨붙어 쓸모가 없어진다. 알맞게 익은 장두바숨은 도홍색이 되어 적집 안에서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오른다고 하지만, 이름난 장인이 아니고서는 식별할 수가 없는 일이다.
⑥ 골 일:무쇠부질을 하기 위하여 가마에다 쇳물을 녹이는 작업으로, 골이란 토둑의 가마 안으로 풀무바람이 잘 통하게 하는 구멍을 말한다. 골일은 고도로 숙달된 우두머리골편수가 총괄하면서 골구멍을 끝손질하며, 둑수리는 가마의 벽을 바르고 숯장이는 숯을, 쇠장이는 판장쇠를 가마에다 집어넣으며, 풀무꾼은 풀무를 밟는데, 그 과정은 쇠둑부리와 비슷하다.
⑦ 오릿일:가마 속에서 잘 녹은 쇳물을 오리(무쇠동이)에 받아서 굽힌 장두바숨의 솥발구멍으로 흘려넣는 작업이다. 이 일에는 불편수의 지휘를 받으면서 일하는 각 2명의 큰괭이꾼 · 솥내기 · 솥굴리기 등 6명과 무쇠가마를 총괄하던 골편수의 지휘를 받는 6명의 오리꾼, 각 1명의 둑수리 · 가래지금꾼 · 발매기꾼 · 쪼글쇠잡이 및 나비짚꾼 등 20명이 등장한다.
큰괭이꾼은 자루가 길고 날이 큰 괭이로 적집을 헐어버리는 일을 맡고, 솥내기는 적집에서 익은 장두바숨을 적집 밖으로 끌어내며, 솥굴리기는 잔뜩 질흙칠을 한 밧줄을 이용해 장두바숨을 끌어다 정해진 장소에 솥발이 위로 가도록 나란히 앉힌다.
한편 골편수의 지휘를 받는 나비짚꾼은 짚재를 한 소쿠리씩 오리에 담아다 넣고, 둑수리는 가마의 초롱구멍을 뚫고, 6명의 오리꾼은 오리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오리채를 한쪽에 3명씩 나누어 맞들고, 초롱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쇳물을 받아다 나란히 놓고 화끈하게 달아오른 장두바숨 쪽으로 운반한다.
이 때 발매기꾼은 점흙으로 만든 나팔 모양의 주레를 솥발 구멍에 가져다 대고, 가래지금꾼은 왼손에 잡고 있는 가래로 장두바숨을 지그시 누르면서 오른손에 잡은 막대(지휘봉)를 가지고 오리와 주레주둥이가 서로 들어맞도록 “앞으로!”, “뒤로”, “옆으로” 따위의 재빠른 신호를 하다가 서로 잘 맞으면 “맞다! 맞다!”라고 외친다.
그러면 오리꾼은 오리채를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주레에 쇳물을 부어넣는다. 이때 나비짚꾼은 질흙칠을 한 짚신바닥으로 쇳물 위쪽에 떠 있는 불순물이 장두바숨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조정한다.
쇳물이 예상대로 잘 들어가면, 가래지금꾼은 “돌름네! 돌름네!”라고 외치고, 그렇지 못하여 쇳물이 멎으면 “섰다! 섰다!”라고 외치면서 쇳물부어넣기를 일단 중지시키고, 장두바숨에 가벼운 충격을 주어 쇳물을 돌게 한다. 이윽고 쇳물이 솥발까지 가득하면, “막슴네!”라는 구령에 따라서 부어넣기를 끝맺는다.
이 때 발매기꾼은 미리 준비해 놓은 점흙으로 솥발 구멍을 막는 일을 하지만, 오리의 쇳물이 소량으로 모자라거나 장두바숨에 쇳물이 가득 찼을 것으로 판단했던 쇳물이 속으로 스며들 것에 대비하여 쪼글쇠꾼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쪼글쇠(작은 쇳물 바가지)의 쇳물로 그것을 보충한다.
이와 같이 무쇠부질은 주형을 만드는 바숨내기, 주형을 익히는 불작업, 쇳물을 녹이는 골작업, 그리고 쇳물을 부어넣는 오리작업 등 크게 4개의 공정으로 분화되어 분업적으로 이루어지는 수공업이었다.
그러나 무쇠부질수공업은 일제식민지정책에 말려들어가면서 1920년까지 버티다가 근대산업으로 인하여 승화되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인류의 문명은 쇠의 이용과 더불어 발전해 왔다. 오늘날에도 쇠는 여러 생산 분야에서 기본적인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세계적으로 쇠의 매장은 비교적 풍부하나 소련 · 오스트레일리아 · 브라질 · 캐나다에서 약 7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들 지역에서 낮은 가격으로 쇠를 생산함으로써 타국의 소규모적인 광산개발은 사양화 현상을 빚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서 910만 톤의 제철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광양에는 270만t 규모의 제철공장이 건설중에 있다.
이들 제철공장에서 필요로 하는 철광석 수요는 1987∼1991년 사이에 연평균 8.8%의 증가가 예상되나 국내 광산들은 저품위화현상, 채광의 심부화현상 등으로 인해 국내 생산은 크게 기대되지 못하고 이로 인해 해외 의존율이 1991년도에 97%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1968년 4월 1일 박태준(朴泰俊) 등 39명의 창립요원에 의하여 발족되었으며, 이때부터 20년 동안의 눈부신 활동은 세계철강 사상 신기원을 창조하였다.
광복 직후 근대적인 의미로 볼 때 철강의 불모지였던 우리 나라에서는 1958년 이래 네 차례에 걸쳐 국가 차원에서 종합제철소건설을 시도하였으나, 자금 · 기술과 경험부족으로 실패하였다.
다섯 번째 시도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도 창립 초기에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국 · 독일 · 영국 · 프랑스 · 이탈리아 등 5개 국으로 구성된 국제차관단(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KISA)을 구성하여 3년 동안 다각적으로 활동하였으나, 당시는 아직 국력이 미약하고 상환능력이 없다는 등의 이유 때문에 실패하고 차관단도 해체되었다.
조국근대화에 종합제철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상황에서 부득이 대일청구권자금 중 일부를 활용하여, 회사창립 후 만 2년이 지난 1970년 4월에 겨우 공장을 착공하였다. 착공 38개월 만인 1973년 7월 3일에는 조강(粗鋼) 연생산량 103만t 규모의 설비를 완성하고 조업 1년 만에 242억 원의 흑자를 올려 세계 철강업계를 놀라게 하였다.
중진국에서는 아직 종합제철건설에 성공한 나라가 없을 뿐더러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완성한 1830년도의 철강생산량이 68만t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국내의 철강수요가 급증하여 1976년에는 2기확장으로 조강 연생산량 260만t, 1978년에는 3기확장으로 550만t, 1981년에는 4기확장으로 850만t의 생산장비를 갖추는 등 조업과 건설을 병행하여 1983년 5월에는 4기 2차공사를 마무리지었다.
총 조강생산량은 910만t으로 착공 13년 만에 단일제철소 규모로서는 포항제철소가 세계 제12위의 대형종합제철소로 부상되었다. 한편 계속 증대하는 국내철강수요에 부응하여 1982년 9월에는 제2제철소 건설에 착수하였다.
전라남도 광양만의 바다 298만 평을 메워 부지를 조성하고 1984년 10월에는 열연공장을, 1985년 3월에는 조강연산 270만t 규모의 광양제철 1기설비를 착공하여 1987년 5월에 준공, 가동하고, 1988년 10월에는 또 270만t의 2기설비를 준공할 예정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의 연생산량 1180만t의 제철능력은 1988년 10월이면 1450만t으로 증대하여 한국의 제강능력은 미국 · 소련 · 독일 · 일본 등 선진국의 뒤를 바짝 쫓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