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상예동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상예동에 있는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의 바위그늘집터와 생활유적.
이칭
약칭
상예동유적(上猊洞遺蹟)
유적
건립 시기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
소재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상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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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서귀포상예동유적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상예동에 있는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의 바위그늘집터 및 생활유적이다. 예래천의 하천 계곡을 따라 형성되었다. 유적에서는 바위그늘집터, 동굴입구집터 등이 확인되었으며, 예래천 하류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하천 범람을 예방하기 위한 돌무지와 하천 서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담수하기 위한 구덩이가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은 곽지리식 토기가 대다수이며 일부 고내리식 토기도 수습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된 유적으로 해석된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상예동에 있는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의 바위그늘집터와 생활유적.
발굴 경위 및 결과

서귀포상예동유적(西歸浦上猊洞遺蹟)은 1994년 예래동 하수종말처리장 확장공사 과정에서 정밀지표 조사와 함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2008년 제주 예래 휴양형 주거단지 조성사업 추진 과정에서 서쪽에 맞닿는 예래동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유적의 성격이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지표 조사 결과 바위그늘집터(6곳)와 동굴입구집터(1곳)가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철기시대∽삼국시대의 대표적인 그릇인 항아리 모양의 곽지리식 토기(郭支里式土器)가 수습되었다. 반대로 바위그늘집터 1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던 깊은 바리 모양의 고내리식 토기(高內里式土器)가 온전한 형태로 출토되었다.

또한, 하천 하류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돌무지와 구덩이 시설이 조사된 바 있다. 돌무지는 하천의 물이 흐르는 방향과 동일하게 축조된 점으로 보아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물둑의 성격으로 해석된다. 구덩이 시설은 하천의 서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으기 위한 담수 시설로 추정된다.

돌무지와 구덩이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대체로 아가리가 밖으로 크게 벌어지고 굽이 형성된 곽지리식 토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주변에 있는 예래동유적과 함께 같은 시기 유적으로 평가되며, 돌무지와 구덩이 시설은 서기전후∽6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반면, 고내리식 토기가 출토된 바위그늘집터는 8∽9세기대 이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 및 평가

서귀포상예동유적은 철기시대 이후 대규모 마을유적으로 알려진 예래동유적과 가까운 곳에 있으며 바위그늘집터와 동굴입구집터로 이용되었다. 또한, 예래천의 하류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드러난 돌무지와 구덩이는 물둑을 비롯한 담수 시설 등 수리 시설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서귀포상예동유적은 제주 서남부 지역의 대규모 중심 마을인 예래동유적의 주변부에 해당하는데, 같은 시기 마을 내 임시집터와 함께 여러 시설물 중의 하나임을 알려 주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상예동유적 조사보고(1)』(제주대학교박물관, 1994)
이청규, 『제주도유적』(제주대학교박물관, 1986)

논문

김경주, 「탐라 전기의 취락구조와 사회상」(『탐라문화』 57,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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