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영친왕과 일본 황족 간의 정략결혼을 저지하기 위해 폭탄 투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67년
본관
달성(達城)
정의
일제강점기 때, 영친왕과 일본 황족 간의 정략결혼을 저지하기 위해 폭탄 투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대구 출신.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초대총무를 지낸 서상일(徐相日)의 동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4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재학 중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경제과를 거쳐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고향에서 학비가 오지 않아 신문배달·직공노릇·인삼장사 등을 하면서 고학하였다. 일본의 동화정책에 적극 반대해 “만약, 대사를 일으킨다면 내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황족 방자[梨本宮方子]와의 가례일(嘉禮日)이 1920년 4월 29일로 발표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서상한은 우편배달부로 가장해 이은의 가례행렬에 투탄하고, 이어 일본 내무성과 외무성을 폭파하고,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과 이완용(李完用)을 폭살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일본인 학생 이마카와[今川生郎]·우에무라[上村劤作] 등과 폭탄을 제조, 동경(東京) 오지(王子)에서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였다. 거사준비 중 일본경찰의 밀정인 주오대학[中央大學] 학생인 신모(申某)의 밀고로 그 해 4월 11일에 붙잡혀 서상한의 계획은 거사일을 목전에 두고 좌절되었다.

1920년 7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해 9월 22일 동경공소원에서 금고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재일조선인의 노동운동에 진력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黑友會) 및 동흥조선노동동맹(東興朝鮮勞動同盟)과 제휴해 1936년 자택을 동흥조선노동동맹 사무실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광복이 될 때까지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경찰에 잡혀, 투옥된 독립운동가를 뒷바라지하는 등 항일민족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서사한이 죽자 재일교포사회에서는 사회장에 준하는 단체장의 예로써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 1975년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국독립운동사』1∼5(국사편찬위원회, 1965∼1969)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 유신사, 1920)
집필자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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