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18책. 필사본. 서문이나 발문은 없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에 서(序) 34편, 기(記) 23편, 명(銘) 18편, 권2에 설(說) 13편, 논(論) 13편, 문(文) 28편, 전(傳) 5편, 권3에 송(頌) 5편, 전(箋) 14편, 발(跋) 5편, 소(疏) 6편, 계(啓) 4편, 부(賦) 7편, 책(策), 조(詔), 녹(錄) 6편, 잡저, 권4∼7에 시, 권8에 대(對)지방론(地方論), 회의(會疑) 2편, 권9에 율(律), 권10에 서(書)·서(序)·명·기(記)·의소(擬疏)·부·발, 권11에 율(律), 권12에 대·기·문·율·의무대안(義務對案), 권13∼18에 율(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설의 「호락설(湖洛說)」은 저자의 종증조가 한원진(韓元震)의 제자로서 호락논쟁으로 말미암아 벼슬길이 막혔는데, 『대산집(臺山集)』을 보고 자세한 논쟁 내용을 알게 되어 후세를 위해 이를 기록한 것이다. 「척왜양설(斥倭洋說)」은 당시 외국의 침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문답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며, 「과폐설(科弊說)」은 과거의 폐단을 지적한 글이다.
논에는 「삼걸론(三傑論)」·「조참론(曺參論)」·「진론(秦論)」 등과 같이 중국사에 대한 이해 및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글이 있다. 그밖에 「삼송론(三頌論)」·「이소겸풍아론(離騷兼風雅論)」처럼 『시경』 및 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는 것, 「태극론(太極論)」·「천지지성기질지성론(天地之性氣質之性論)」 등 성리학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있다.
문에는 제문·축문·행장·통문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통문에는 경복궁을 중건할 때 양주읍 거주자들에게 원납전(願納錢)을 내도록 권유한 것과, 영남·호남 지방의 유생들이 양이(洋夷)의 침투 문제로 복합(伏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양주 향교에 이를 알리려고 보낸 것이 있다. 「불국산백호암공불문(佛國山白毫庵供佛文)」은 저자가 불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 준다.
소(疏)는 서학의 보급, 1895∼1896년의 여러 가지 사건 및 개혁 등을 겪으면서 위정척사의 처지에서 지은 것이다. 책은 「병재책(兵財策)」으로 양병(養兵)과 이재(理財)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며, 녹은 임오군란, 서원 철폐, 당백전(當百錢)의 주조 등 당시 국내의 정치·사회적인 변화를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글이다.
방대한 분량의 시는 오언고시·오언배율·오언율시·칠언고시·칠언배율·칠언절구·칠언율시 등 그 형식이 다양한데, 특히 칠언율시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내용은 자연을 노래한 것 외에도, 「문경보오적유변(聞京報五賊有變)」·「갑신력(甲申曆)」·「문의병작폐촌리(聞義兵作弊村里)」 등과 같이 당시 국내외의 급박한 정세를 반영하여 지은 것이 다수 있다. 「자탄시(自嘆時)」·「고우음(苦雨吟)」 등은 거사로 살아가는 자신의 심정을 읊은 것들이다.
「지방론(地方論)」은 성균관장이 물은 분전정세(分田定稅)·타량(打量)·향리(鄕里)·호적(戶籍)·경비(經費) 등 30개 조목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힌 것이고, 회의는 『근사록』·『대학』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 말 유학자의 학문 경향, 국내의 정치·사회·경제적인 변화와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에 대한 인식 및 대응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