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영파(影波), 자는 회은(晦隱), 성은 전씨(全氏). 아버지는 만기(萬紀)이며, 어머니는 박씨이다. 화엄학(華嚴學)과 선(禪)·염불 등에 모두 밝았던 대강사(大講師)이며, 대둔사(大芚寺: 현재 대흥사(大興寺)) 13대 강사(講師) 중 1인이다.
15세에 청량암(淸凉庵)에서 승려들이 불공드리는 모습을 보고 출가할 결심을 하였고, 1747년(영조 23) 용천사(湧泉寺)환응(喚應)장로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해봉(海峯)·연암(燕巖)·용파(龍坡)·영허(影虛) 등을 찾아 도를 물었다.
하루는 돈오(頓悟)를 결심하고 금강대(金剛臺)에 머물면서 이포성공척결도량(伊蒲盛供滌潔道場)을 설하여 관세음보살의 법력을 구하였다. 9년 뒤 황산(黃山)의 퇴은(退隱)으로부터 『화엄경(華嚴經)』 전질(全帙)을 받아 30년 동안 연구하여 현리(玄理: 깊은 이치)와 묘오(妙悟: 높은 깨달음)를 체득하였다.
그는 선을 공부할 때도 『화엄경』을 탐독했고,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관세음보살을 『화엄경』에 입각하여 원불(願佛)로 삼았다. 설파 상언(雪坡尙彦)과 함월 해원(涵月海源)을 찾아가 화엄의 종지(宗旨)와 선의 진수를 체득하여 해원으로부터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그 뒤 등단(登壇)하여 대둔사·은해사(銀海寺) 등에서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1777년(정조 1)부터 1781년까지의 5년 동안 대비주(大悲呪) 10만 번을 염송하였는데, 그것을 하루의 일과로 삼았다. 1812년 7월 27일 입적하였으니 세수 85세, 법랍 66세였고 은해사에 비가 세워졌다.
연담 유일(蓮潭有一) 이후 다문(多聞)과 덕망(德望)이 가장 뛰어난 승려로 평가를 받았던 그는 결코 희로(喜怒)를 얼굴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고, 뜻을 일찍부터 정토(淨土)에 두어 세속에 물드는 일이 없었다.
항상 자비로써 병든 자를 보면 지극히 간호하였고, 재력에 따라 가난한 자를 보살폈다. 자신에게는 게으름을 용서하지 않았고, 몸단속을 단정히 하여 가부좌를 흩뜨리는 일이 없었다.
평생토록 남의 시비를 말하지 않고 의가 아니면 티끌 하나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으며, 불경 1,000상자를 배에 싣고 동해와 남해의 명찰을 편력하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저술은 전하지 않으며 제자로는 낙허 치관(樂虛致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