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계파(桂坡). 본래 경상북도 학가산(鶴駕山)의 승려이었으나 화엄사(華嚴寺) 벽암 각성(碧巖覺性)의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하여 도를 이루었다. 화엄사의 장륙전(丈六殿)은 그의 원력(願力)에 의하여 1699년(숙종 25)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을 보았는데, 이에 얽힌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장륙전 중건을 위하여 100인의 승려들이 대웅전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는데, 그는 기도의 원만한 성취를 위하여 공양주(供養主)를 자원하였다. 백일기도가 끝나는 회향일(廻向日)에 한 노승의 꿈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서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으로 화주승(化主僧)을 삼아야 불사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100인의 대중이 모두 시험한 결과 성능(性能)만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아 화주승이 되었다.
성능은 화주할 걱정에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다음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는 문수보살의 말씀이 들렸다. 그러나 다음날 처음 만난 사람은 절에 자주 들르는 거지노파였다. 그 노파는 성능에게 시주를 요구받자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환생하여 큰 불사를 이루겠나이다.”하며 서원을 세운 뒤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뒤 성능은 5, 6년을 걸식하여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한양 창덕궁에 이르러 마침 유모와 함께 궁 밖을 소요하던 공주와 마주쳤는데, 공주는 우리 스님이라면서 반가워하였다. 공주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손을 펴지 않았는데 성능이 이를 펴보니 손바닥에 ‘장륙전’ 3자가 쓰여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성능을 도와 장륙전을 완성하게 하였고, 사액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 하였다 한다.
그 뒤 숙종은 1711년(숙종 37) 한양 수비의 요충인 북한산성 축성을 성능에게 위임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의 직위를 내렸는데 9개월 만에 축성을 완료하였다. 다시 화엄사로 돌아온 그는 수행의 여가에 산성기사(山城紀事)를 집필하였다. 그는 이 『북한지(北漢誌)』를 판각하여 1745년(영조 21) 신임 도총섭인 서봉(瑞鳳)에게 인계하였다.
그 뒤에도 그는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를 이루었으며, 다시 통도사(通度寺)로 옮겨 통도사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세우고 계단탑(戒壇塔)을 증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