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

자운 / 성우
자운 / 성우
불교
인물
해방 이후 동국역경원장, 조계종 단일계단 전계대화상 등을 역임한 승려.
이칭
자운(慈雲)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1년
사망 연도
1992년
출생지
강원도 평창
정의
해방 이후 동국역경원장, 조계종 단일계단 전계대화상 등을 역임한 승려.
개설

성은 김씨(金氏). 호는 자운(慈雲). 법명은 성우(盛祐). 강원도 평창 출신. 아버지는 자옥(玆玉)이며 어머니는 인동(仁洞) 장씨이다. 참회와 성찰을 강조하고 계율정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7살 때부터 진부서당에서 『동몽선습』을 배우기 시작하여 15살에 사서삼경을 모두 익혔다. 탁발 나온 혜운(慧雲)에게서 순치(順治) 황제의 출가시(出家詩) 한 구절을 듣고, 1927년 1월 합천 해인사(海印寺) 장경각(藏經閣)에서 3천배를 하고 혜운을 은사(恩師)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1932년 동래 범어사(梵魚寺) 승가대학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였고,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3년 결사로 용맹정진하였으며, 1938년 용성(龍城)에게 법통을 전해 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는 청담(淸潭)·성철(性撤) 등과 함께 경상북도 문경시 회양산 봉암사(鳳巖寺)에 특별백팔 수도 도량을 설립하고 한국불교의 중흥을 서원하였다. 여기에서 108참회, 능엄주 독송, 조석 예불 등 수행 의례를 쇄신하였고, 현재 조계종의 통일된 법복으로 정해진 보조장삼(普照長衫)과 율장에 의한 괴색가사(壞色袈娑) 착용, 철발우(鐵鉢盂) 사용, 육환장(六環杖) 소지, 오후 불식(不食) 등의 엄격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실천하면서 3년간 결사하였다.

1939년 그는 불교의 전통을 중흥하려는 큰 원을 세우고, 오대산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1백일 간 문수기도로 철야정진을 하여, 문수보살로부터 계율정신을 진작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후 감로계단을 설치하여 율문을 강설하는 한편, 출가자의 수행이나 재가자의 신행에 있어 무엇보다도 자기 성찰이 앞서야 함을 주장하고 『자비도량참법』을 간행·유포하여 참회정진 수행을 권장하고 토착화시켰다. 또한 한문본 『범망경(梵網經)』을 번역하여 5만여 권을 간행, 전국 사찰에 유포해서 계율사상을 진작시켰다.

1955년합천 해인사 주지, 1956년 재단법인 해인학원 이사장에 이어 1957년조계종 중앙감찰원장을 역임하였고, 1960년 5월에는 스리랑카에서 열린 세계불교승가연합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또한 1967년부산 동래 범어사(梵魚寺) 주지를 비롯하여 1975년조계종 규정원장, 1976년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고, 그 해 조계종 원로에 추대되었으며, 1977년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1979년동국역경원장,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單一戒壇)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을 역임하였다.

남·북방 각국의 불교 현황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시찰한 뒤 한국불교가 가장 순수하고 자랑스럽다고 자부하면서 후학들에게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간 존엄의 도덕성 회복을 역설하였다. 또한 자비에 바탕을 둔 보시정신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비전(悲田)을 실천하라고 강조하면서, 정토사상을 방편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1948년부터 1990년까지 그에게 수계한 제자가 무려 10만 명에 달하였고, 평생 동안 오후 불식을 하면서 한국불교의 기강을 확립하고 승풍을 북돋는데 공이 컸다. 말년에는 아미타불 명호를 10만 번씩 칭명하는 것을 유일한 일과로 수행에 정진하였다.

1992년 2월 7일 해인사에서 임종게를 자필로 남기고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입적하였다. 해인사 연화대에서 다비한 뒤, 사리 19과와 녹두 크기의 사리 1,000여 개가 나왔다. 저서로는 『보살현감(菩薩玄鑒)』, 『제경정화(諸經精華)』, 『정토법요(淨土法要)』, 『연종보감(蓮宗寶鑑)』, 『수계의식(受戒儀式)』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행적비와 사리탑이 해인사 일주문 동쪽에 있다.

참고문헌

『자운어록(慈雲語錄)』
「자운율사행적비(慈雲律師行蹟碑)」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지관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