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1591년(선조 24) 갑산부사로 부임하여 재직 중, 이듬해 임진왜란을 당하여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영(李瑛)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함께 왜적에게 잡혀가자 그 후임이 되었다.
함흥을 점령한 왜적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하여 황초령전투(黃草嶺戰鬪)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부하 장수의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과감한 공격을 제지하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59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진주목사를 거쳐 정유재란 때는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경상도 해안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1598년 8월 생포한 왜적을 심문한 결과 토요토미[豊臣秀吉]의 병이 중하며, 부산·동래·서생포(西生浦)의 왜적이 장차 철수할 계획임을 조정에 알려 이에 대비하게 하였다.
또, 11월에는 다시 생포한 왜병으로부터 “토요토미가 7월 초에 이미 병사했고 토쿠가와[德川家康]가 대장이 되어 국사를 장악했으며, 가토[加藤淸正]가 곧 귀국하기로 되어 있어 그를 데려가기 위해 빈 배 50척이 와서 행장을 꾸리는데 군량과 전마(戰馬) 3분의 1은 이미 배에 실었다.”는 내용의 정보를 조정에 알려 1주일 뒤에 있을 노량해전(露梁海戰)에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전란 직후 제주목사가 되었으며 그 뒤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04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성격이 곧고 결백했으나, 가는 곳마다 군민(軍民)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여 원한을 샀으며 이 때문에 양사(兩司)로부터 자주 탄핵을 받았다. 1607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통제사가 되었다가 곧 수원부사 겸 방어사로 관직이 교체되었고 그 뒤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