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63년(명종 18) 사복시판관이 되었는데 사노(私奴)를 마적(馬賊)으로 잘못 알고 살해하여 파직당하였다. 그 뒤 복직되어 1587년(선조 20)에 순천부사(順川府使), 1589년에 전라병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임명되어 경상도로 가던 중 조방장 박종남(朴宗男)과 함께 의흥(義興)에서 왜적을 만나 죽령을 거쳐 의주 행재소(行在所: 正宮을 떠나 임시로 마련한 왕의 처소)로 향하였다.
전란중 방어사 심희수(沈喜壽)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고 요동(遼東)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명나라 장수 접대 등에 공로가 많다 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거론되었으나 책록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