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의 기원은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耽羅志≫에 “신라 때 고후(高厚)·고청(高淸) 및 셋째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셋째에게는 도내(徒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처음 나타난다.
그 뒤 938년(태조 21)왕건(王建)이 고려의 창업을 성취하자 탐라국주(耽羅國主)인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고말로(高末老)를 보내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고말로에게 성주왕자라는 관작을 제수하였다. 이 때부터 국주 대신 성주라는 명칭으로 탐라국을 상징했으며, 고려 중기까지 성주가 정무(政務)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1153년(의종 7)에 탐라국이 지방 행정 제도상의 일개 현(縣)으로 격하되고,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는 안무사(安撫使)·방어사(防禦使)·부사(副使)·목사(牧使) 및 판관(判官) 등의 경래관(京來官)이 행정 사무를 관장하면서부터, 성주는 정무에 대한 권한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성주직은 한갓 탐라국의 상징적 존재로서 존속하였다.
그리고 조선 태종 때 지방 제도를 개혁해 국가의 기반을 확립했는데, 탐라도 이러한 시책에 순응해 1402년(태종 2)에 성주 고봉례(高鳳禮)와 왕자 문충세(文忠世)가 입조해 성주·왕자의 칭호가 분수에 넘치니 개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탐라 왕의 별칭이었던 성주가 탐라를 관장했던 16대 464년간에 걸친 탐라국의 성주시대가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