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 3·1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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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919년 3·1운동 때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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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1운동 때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내용

성천군은 군사적 요지로서 경술국치 이후에는 천도교세(天道敎勢)가 크게 떨쳐, 3·1운동 때 천도교인이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천의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천도교 성천교구장이던 쌍룡면 상평리 출신 이돈하(李燉夏)가 1919년 2월 하순, 평양에서 열렸던 대교구장회의에 참석했다가 서울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2월 28일 급히 돌아오면서부터 계획되었다.

이돈하는 즉시 천도교 중진들과 만나 거사를 계획하고 3월 4일 오전 11시 읍내 천도교구당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모인 군중은 남녀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4,000여 명이었으며, 이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 뒤에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각기 도장을 가지고 참석하였다.

군중은 12시 정각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상부리(上部里)헌병대로 시위 행진해갔다. 이들이 헌병대 정문 앞에 도달하자 일본헌병과 조선인 보조원 10여 명이 일렬 횡대로 서 있다가 돌연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그 자리에서 20여 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하였으며, 500여 명이 붙잡혔다.

성천군에서는 이 밖에도 일곱 번의 운동이 더 있었고, 시위에 참가한 군중의 총수는 5만 1000여 명, 사망자 36명, 부상자 60명, 피검자는 535명에 달해, 이 곳의 독립만세운동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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