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周書)』나 『수서(隋書)』등에 전하는 고구려 관등 중 소사자(小使者)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말기의 14관등 가운데 제10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상은 『삼국사기』잡지(雜志) 직관조에 ‘고구려인위(高句麗人位)’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의하면, 686년(신문왕 6)에 고구려 유민들에게 신라의 경위(京位)를 주었는 바, 그 본국의 관품(官品)을 헤아려서 신라의 품계를 주었다고 한다.
이 때 고구려의 소상은 ‘적상(狄相)’과 함께 나마(奈麻, 11位)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인에게 신라의 경관을 준 것은 안승(安勝)이 이끌던 소위 보덕국(報德國)의 반란이 평정된 2년 뒤의 일로서, 그 보덕국에 참여했던 고구려인들을 회유, 포섭하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소상이 보덕국에서 새로이 마련된 관등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보덕국에 참여한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 망명한 유민들로서, 이들이 새로이 개혁정치를 시도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또한 그들의 관계조직에 고구려의 관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많은 점을 볼 때, 소상이란 것도 기왕의 고구려 관계조직에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한원(翰苑)』에 의하면 고구려 관등에는 몇가지 이칭이 보이는데, 이 소상도 소사자에 대한 이칭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