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병암(屛巖). 중군사정(中軍司正) 소희(蘇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 소효식(蘇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소자파(蘇自坡)이며,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왕석주(王碩珠)의 딸이다.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의 형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다.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小說)·불경(佛經)에까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문장과 글이 물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대간(臺諫)·시종(侍從)으로 시강(侍講)하였으며, 주서(奏書)와 상소는 거의 소세량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516년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서리들의 기강을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4년 후 홍문관수찬, 사헌부의 지평·장령, 홍문관의 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1522년 사간,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524년 대사간에 승진되었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부사를 자원하였다. 이때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평생 글을 좋아하여 가산은 돌보지 않았으며 효우(孝友)하였고 향리(鄕里)의 후배를 양성하여 크게 교화하였다.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암집(屛巖集)』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