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생가는 정면 4칸 · 측면 1칸 반의 건평 10평 정도의 초가집으로 1971년에 보수한 것이며, 1978년에는 막돌담장에 한식기와를 얹어 다시 정비하였다.
한편 1961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충북문화재보존회에서 생가 부근 야산에 유허비를 세우고 주위에 보호시설을 둘렀다.
손병희(1861∼1922)의 본관은 밀양(密陽) · 초명은 응구(應九)로 1861년(철종 12) 4월 8일 현재의 북이면 금암리 대주촌(大周村)에서 태어났으며, 의암(義菴)은 도호(道號)이고 일본 망명 때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1882년(고종 19) 동학에 입문하여 1897년 동학의 3대 교주가 되기까지 보은집회(報恩集會) ·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으며, 1901년 일본에 망명한 이후로는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주로 교육 · 언론활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도하여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던 중 1922년 5월 19일 순국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봉황각(鳳凰閣)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