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손병희 생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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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손병희 선생 유허지
손병희 선생 유허지
근대사
유적
국가유산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에 있는 천도교 창시자 손병희의 생가. 탄생지.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청주 손병희 생가(淸原 孫秉熙 生家)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순절지
지정기관
충청북도
종목
충청북도 시도기념물(1979년 09월 29일 지정)
소재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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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에 있는 천도교 창시자 손병희의 생가. 탄생지.
내용

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생가는 정면 4칸 · 측면 1칸 반의 건평 10평 정도의 초가집으로 1971년에 보수한 것이며, 1978년에는 막돌담장에 한식기와를 얹어 다시 정비하였다.

한편 1961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충북문화재보존회에서 생가 부근 야산에 유허비를 세우고 주위에 보호시설을 둘렀다.

손병희(1861∼1922)의 본관은 밀양(密陽) · 초명은 응구(應九)로 1861년(철종 12) 4월 8일 현재의 북이면 금암리 대주촌(大周村)에서 태어났으며, 의암(義菴)은 도호(道號)이고 일본 망명 때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1882년(고종 19) 동학에 입문하여 1897년 동학의 3대 교주가 되기까지 보은집회(報恩集會) ·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으며, 1901년 일본에 망명한 이후로는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주로 교육 · 언론활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도하여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던 중 1922년 5월 19일 순국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봉황각(鳳凰閣)에 있다.

참고문헌

『인물지』(충청북도, 1987)
『문화재지』(충청북도,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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