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이곳은 서울의 외곽을 지키는 송파진(松坡鎭)이 있어 별장(別將)이 다스렸는데, 별장은 송파나루 외에도 삼전도(三田渡) · 동잠실(東蠶室) · 광진(廣津) · 독음(禿音) 등의 나루터를 함께 관할하였다.
이곳은 서울과 광주(廣州)를 잇는 중요한 나루터로 땔나무와 담배 등을 서울에 공급하였다. 송파는 나루터보다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더 컸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는 270여 호의 객주집이 있어 전국의 10대 상설 시장 중의 하나로 번성하였다.
이는 서울 주변의 일반 상인들이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피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이나 관동 지방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이곳에서 미리 사들여 도가상업(都家商業)의 근거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피해를 받는 시전 상인의 항의가 있었으나 광주유수(廣州留守)가 이를 막아 송파 시장은 계속 유지되었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와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송파의 시장 기능은 쇠퇴하였다.
나루터의 기능은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잇는 정기선이 운항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 강남 지역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샛강의 매립과 교량의 건설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7마당 9거리로 구성된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200여 년 전 이곳 시장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한강 유역의 비옥한 퇴적평야 지대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알려진 곳이다. 몽촌고분군(夢村古墳群)과 백제의 토성이 남아 있으며, 올림픽 경기장의 일부가 형성되어 있다. 부근의 가락동 시장은 옛날 송파 시장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