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고구려 땅이었으며, 고려 초에 수주(隨州)가 되어 북계(北界)의 관할하에 있었다.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군이 이곳과 창주(昌州, 지금의 昌城)를 함락시키어 주민들이 자연도(紫燕島)로 피난하였다가 1261년(원종 2) 돌아와 곽주(郭州) 해안에 몰려 살게 되었다.
땅을 잃었다 하여 곽주의 동쪽 16촌과 안의진(安義鎭)을 떼어서 지수주사(知隨州事)를 두고 곽주를 함께 다스리게 하다가 1371년(공민왕 20)에 곽주를 분리시켰다. 1413년(태종 13) 수주를 수천(隨川)으로 고치고 군으로 강등하였으며, 1465년(세조 11) 정주(定州)에 편입시켰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정주 남쪽 15리 지점에 있었으며 달천강(㺚川江) 하구의 해안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쪽과 남쪽 두개의 산맥이 동서로 뻗쳐 있는데, 북쪽에는 구령산(仇寧山)·고당산(古堂山) 봉수가 있었고 남쪽에는 진해곶(鎭海串)·입피산(立彼山) 봉수가 있어 곽산(郭山)과 가산(嘉山) 지방을 연결해주었다. 당시에는 해안지방에 목장이 있어 말을 길렀으며 도치곶(都致串)에는 창(倉)이 있어 물자를 수송, 보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