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카드에 올려져 사용되었던 놀이로 일명 ‘가투(歌鬪)’라고도 한다.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까지 유행하였다. 이 놀이는 윤태오(尹泰五)가 경영하던 불선사(不羨舍)에서 1922년에 ≪가투≫를 발행한 데 이어,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새봄 첫머리 현상 가투대회’(1926.2.25.)를 조선일보사가 후원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조선일보≫는 1926년 1월 5일자 3면에 <자미 잇는 가투노리-조선뎍 취미를 본위로 한->이라는 해설을 싣고, 이후 14회에 걸쳐 <가투에 실린 시조 백수>를 분재하였다. 이 행사를 제1회로 하여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가투대회는 1940년 1월 13일에 제12회에 이르렀다. 가투는 ‘읽는 쪽’과 ‘집는 쪽’이 각 100장씩인데, ‘읽는 쪽’에는 시조 한 수가 모두 적혔고, ‘집는 쪽’에는 종장만 적었다.
가령 4명이 시조놀이를 한다면, 그 중 1명은 창수(唱手)가 된다. 창수는 ‘읽는 쪽’을 차지하고, 나머지 3명은 ‘집는 쪽’을 고르게 분배한다. 창수가 ‘읽는 쪽’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 시조에 해당하는 ‘집는 쪽’을 먼저 찾아내는 이가 득점하게 된다. 잘못 짚었을 때에는 벌점이 있다. 창수는 ‘읽는 쪽’을 읽는 한편, 상벌과 승부규칙을 결정하는 심판관을 겸한다.
한성도서(주)는 1935년 불선사의 ≪가투≫를 ≪시조노리≫로 개편하였다. 시조 100수의 선정을 이은상(李殷相)에게 위촉하였고, 최영수(崔永秀)가 ≪가투≫에는 없던 삽화를 그려 넣었다. 또한, 가투의 크기를 2배로 하였다. 가투가 개편됨에 따라 동아일보사에서는 제1회 ‘부인 가투의 밤’을 개최하였다(1936.1.25∼26).
이 행사는 조선일보사의 가투대회와 함께 ‘시조노리’가 정초의 부인놀이, 나아가 부녀자의 정월민속으로 한층 구체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동아일보사의 ‘부인 가투의 밤’은 1940년 1월 21일에 제4회에 이르렀다. 가투는 신민사(新民社)에서도 발행하였다. 1927년에 ≪정선 화가투 精選花歌鬪≫를 제작한 이래 ≪개량 화가투≫(1928), ≪정제 화가투≫와 보급판 ≪가투≫(1931)로 개편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신민사가 발행한 가투의 놀이방법은 불선사의 것과 대동소이하면서도 여기에 복잡한 몇가지의 방법을 개발, 추가하였다. 또한, 신민사의 가투는 트럼프와 화투를 겸할 수 있도록 고안, 제작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순수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가투의 체재라든가 놀이방법은 일본에서 메이지(明治) 중기이래 정월민속으로 전래한 가투놀이(歌ルタ遊ピ)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그럼에도 놀이의 주재가 시조였다는 점, 부녀자의 고상한 취미생활의 요구와 합치될 수 있었다는 점, ‘조선 정조(朝鮮情操)’를 일깨울 수 있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시조문단과의 관련으로 보면 시조부흥운동의 분위기 조성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기도 하였다.